2018년 초부터 대한민국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는 단연 ‘미투(me too)’다. 미투 운동의 본질이자 핵심은 ‘권력’으로 인한 부당한 성폭력의 고발이다. 그렇기에 미투는 오랫동안 쌓여온 한국 사회의 적폐를 해소하는 동력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제주지역 동네책방들이 합심해 미투 운동에 동참하는 ‘위드유(with you)’ 프로젝트에 나섰다. 책방들은 저마다 페미니즘 책을 한 권씩을 도민들에게 추천한다. <제주의소리>는 위드유, 나아가 미투에 공감하며 동네책방의 추천도서를 소개한다. 서평은 책방지기들이 정성껏 작성했다. 소개 순서는 가나다 순이다. [편집자 주]

[책으로 만나는 with you] (6) 파파사이트 《코끼리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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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 가면》, 노유다, 움직씨, 2016. 제공=노유다. ⓒ제주의소리

어린 시절 친오빠들에게서 성폭력을 당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작가가 됐고, 십여 년 동안 글과 그림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기록하고, 출판사를 설립하고, 2016년에 《코끼리 가면》이 라는 책을 출간했다. 언론들과 온라인 서점들은 이 책에 달려있는 ‘성폭력 퀴어 생존자 이야기’라는 꼬리표에 흥미를 보이고 사람들에게 그 꼬리표를 크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의 심장을 타격한 결정적인 한 방은 성폭력과 생존자 사이에 삽입된 퀴어가 아니다.

《코끼리 가면》에는 작품 속 ‘나’의 부모와 2남 1녀로 이뤄진 평범한 가족이 등장한다. 여섯 살, 두 살 터울의 두 친오빠들은 부모 몰래 일곱 살 ‘나’의 몸과 성기를 만진다. 부모가 집을 비운 수원의 지하 단칸방에서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오빠는 여동생을 겨냥한 성폭력을 시작한다.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한 남자아이들의 흔한 성적 호기심과 성장통으로 다뤄질 수도 있는 이 실화를 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거듭나게 한 문학적 장치는 퀴어가 아니라 평범한 엄마다.

남편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테니스강사로 일하면서 세 남매를 키우는, 드라마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참 바쁘게 사는 평범한 엄마. 그 일이 처음 일어난 지 십여 년 후에 여자아이가 오빠들에게서 당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자 평범한 가족의 엄마는 “세상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될 더러운 이야기”라며 피해자 딸의 말을 틀어막고, “오빠들은 집안 대들보니 가시나가 기죽이면 못 쓴다”고 가해자 아들들을 비호한다.

또다시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들의, 아들을 위한, 아들에 의한 세상에서 ‘나’는 평범한 가족들에게서 침묵을 강요받고, 성폭력의 후유증으로 양극성 장애를 겪는다. 자신이 겪은 일이 아동·친족 성폭력임을 인지하게 된 후에도 ‘나’는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닥치는 대로 먹고 먹어서 코끼리처럼 몸을 키우려 했다. 그리고 코끼리가면을 쓰고 강한 척 하면서 살아갔다. 길을 가장 잘 찾는 지혜로운 할머니 코끼리가 우두머리가 돼 무리를 인도하고, 수컷 코끼리들은 열 살이 되면 자연스레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코끼리 세계처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이후 집을 나와 독립한 ‘나’는 피붙이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사람 ‘나낮잠’을 만나고, 그 유일한 사람과 연인이 돼 같이 살 집을 얻고, 양극성 장애도 잘 버틴다. 그리고 낮잠과 함께 구미 옛집을 찾아가 가족의 오래된 비밀을 폭로하며 싸운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나’의 울분에 결혼해서 어린 남매를 둔 큰 놈은 “억울하면 강해지라”고 조롱하고, 이전에 딸을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던 엄마는 “사내 기죽이면 못쓴다”고 딸의 비명을 끝끝내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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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영주 파파사이트 대표. 제공=파파사이트. ⓒ제주의소리
괴물 같은 가족과의 연을 끊고 ‘노유다’로 자신의 이름을 명명한 ‘나’는 반려자가 된 낮잠과 같이 출판사 움직씨를 차리고,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십여 년 동안 다듬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코끼리 가면》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호주제가 폐지된 지 10년이 지난 올해, 한국어·영어 바이링궐(bilingual) 에디션으로 출간되는 《코끼리 가면》 개정판은 출판사 움직씨의 문학시리즈 ‘미투(me too)’의 첫 번째 책으로서 독자들을 만난다. 코끼리 가면을 벗은 ‘나’는 두 개의 언어로 침묵의 감옥에 갇힌 피해자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연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다음 여정에서 나는 세렝게티 할머니 코끼리처럼 현명해질 것이다. 기억의 무게만큼 아는 것이 많으며, 함정이 있는 길은 굳이 걷지 않고, 포악한 맹수가 와도 소리를 내어 쫓아내거나 여차하면 머리로 치받을 수 있다. 경계를 벗어나 독립한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앞으로 더 안녕히 살아갈 것이다.” - 《코끼리 가면》 가운데 일부.

그러니 친족 성폭력 생존자의 부르짖음을 움켜쥐고 당신도 부디 살아남으시라. 그리고 더 안녕히 살아내시라. 할머니 코끼리처럼. / 홍영주 파파사이트 대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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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사이트는?

파파사이트(PAPASITE)는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안에 있는 북갤러리이다. 
예술인마을이 위치한 동네는 종이의 재료로 쓰이는 닥나무가 많아서 예로부터 
닥나무 ‘저(楮)’를 품은 저지리로 불리었다.

건축이 한창 이루어질 당시 우연치 않게 마을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된 순간부터 
종이책의 시공간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미 갤러리로 설계된 건물이었기 때문에 책을 파는 공간보다는 책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지향점만 있는 상태에서 종이책(paperbook), 예술(arts), 순례자(pilgrims), 커피(americano)의 앞글자를 조합하여 ‘파파사이트(PAPASITE)’로 명명했다.

2016년부터 매해 봄, 가을에 열리는 기획전시와 북콘서트를 통하여 북갤러리 파파사이트의 색깔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특히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에서는 뒷전으로 밀려난 책들을 중심으로 출판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책들과 출판사,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큐레이션에 집중한다. 

올해 봄시즌에는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출간 40주년을 기념하여 근현대사의 그늘에서 살아낸 난쟁이들을 기록하고 인간과 집의 관계를 조명한 40권의 책을 소개하는 전시가 3월 27일부터 5월 12일까지 열린다. 전시기간 중 4월 19일 오후 11시~1시에는 《코끼리가면》 책모임을 열린다. 
신청은 010-2717-5821(문자), 참가비 5000원.
 
운영시간: 월요일 휴무, 화요일-토요일 오후 1시-7시, 일요일 오후 2시-7시
SNS 및 문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papasiteje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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