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천만세운동 함덕리주도 한백흥 선생
초대함덕리장때 토벌대로부터 청년들 구하려다 억울한 ‘희생’

제주4.3이 발발한지 59년을 맞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 3월14일 4.3중앙위에서 지금까지 보류됐던 사형수와 무기수 등 수형인을 희생자로 인정하면서 4.3명예회복을 사실상 마무리 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아직도 4.3의 아픔이 가시질 않고 있습니다.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는 현장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그들은 여전히 '4.3의 덫'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제주의 소리가  4.3 59주년을 맞아 4.3 명예회복의 허상을 추적합니다./편집자주 

▲ 조천항일기념관에는 조천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주요인사들을 전시하고 있다. 오른쪽 맨 아래가 한백흥 선생이다.

한하용(62. 4·3희생자유족회 조천읍지회 상임부회장) 한형범(60. 국민연금관리공단 북부산 지사장) 형제(사촌)는 아직도 4·3의 아픔이 가시질 않고 있다면서 진정한 명예회복은 아직 멀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 한백흥 선생
이들 형제의 할아버지인 한백흥(韓伯興. 1897~1948) 선생의 억울함 때문이다. 함덕리 주민이었던 한백흥 선생은 20대 청년시절 조천만세운동으로 항일활동에 적극 주도하고 가담한 함덕리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런 선생이 4·3사건 당시 토벌대에게 어이없이 희생당한 이유도 억울한데,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 황당하고 비극적인 죽음은 4·3희생자라는 ‘덫’이 되어 선생의 독립유공 공적을 가로막고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한백흥 선생의 본관은 청주다. 조천면 조천리 1338번지에서 한창원(韓昌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기미년 3월1일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시위운동이 봇물 터지듯 일어났고, 그 해 3월21일 급기야 조천리에 까지 파급되어 4일간에 걸쳐 조천·신촌·신흥·함덕 등지에서 주민1500여명이 거세게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한백흥 선생도 약관의 나이로 조천만세운동을 적극 주도한 혐의로 붙잡혔다. 3월21일 조천 미밋동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신촌·신흥·함덕리까지 불길 치솟듯 확산되며 24일까지 네 차례나 연속적으로 전개됐지만 주도자들이 모두 붙잡힘으로써 일단락됐다.

▲ 한백흥 선생의 독립유공활동을 보도했던 도내 한 일간지 기사.
시위과정에서 일제경찰에 검속된 인원은 모두 29명이다. 이 중 23명 모두가 1심에서 징역1년에서 집행유예 3년까지 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한백흥 선생도 그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칙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4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조천항일기념관 전시관에도 ‘조천3·1만세운동의 주역들’로 10명의 이 지역 인사들 사진이 전시되고 있는데 한백흥 선생도 이중 한명으로 소개되고 있어 그의 비중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한백흥 선생은 초대 함덕리장을 맡아 지역사회를 이끄는데 헌신했다. 그러던 중 4·3사건이 발발했고, 그의 짧은 인생도 피비린내 나는 4·3의 광풍속에 안타까운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한하용·형범 사촌형제는 4·3 당시 세 살, 한 살이었다. 세살이었던 하용씨는 할아버지를 제대로 기억해내진 못했지만 어머니 등에 업혀 한밤중에 몰래 할아버지 시신을 수습할 때 대성통곡하던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만세운동 주도혐의로 검속당한 한백흥 선생은 당시 재판에서 징역4개월 집행유예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수형인명부.
그때의 울음이 무슨 울음인지를 안 것은 훨씬 지나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모래밭에서 귀청이 뚫릴 듯 가슴을 저미게 하던 어머님의 통곡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두 형제는 할아버지 한백흥 선생의 희생과 당시 함덕 마을의 상황을 이렇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1948년 11월에 접어들면서 조천면의 상황은 더욱 험악해졌습니다. 토벌대는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잡아다 총살했다고 합니다. 토벌대에 맞서 무장대 역시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해 지서를 습격하거나 토벌대에 협력하던 우익가족을 지목해 살해했습니다.
11월 1일이었을 겁니다. 토벌대는 함덕리 주민들을 현재의 함덕중학교 뒤편 평사동 모래사장에 집결시켰습니다. 그리고는 함덕리 6명의 청년들을 끌고나와 ‘이 사람들은 폭도들과 내통한 혐의다. 앞으로 폭도와 연락하거나 식량을 제공한 사람은 이렇게 된다.’며 구덩이 여섯 개를 파놓고 처형하려 했습니다.
이에 함덕리 구장이셨던 한백흥 할아버지와 마을 유지였던 송정옥(宋貞玉) 씨 등이 나서서 ‘이 청년들의 신원을 우리가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며 ‘학살극을 만류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젊은 사람들은 마소를 키우는 테우리(목동)들이어서 산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지 폭도들이 아니다’라며 ‘목숨만 부지시켜주면 우리 마을유지들이 잘 선도해서 지도해나가겠다’고 호소했는데 토벌대 군인들은 오히려 ‘이 자들도 폭도의 일당이다’라며 양쪽에 구덩이 하나씩을 더 파게하고는 현장에서 무참히 총살되고 청년들과 함께 구덩이에 파묻혔습니다”라고 이야기 했다.

▲ 한백흥 선생이 4.3희생자로 등록되던 지난 2002년에 증언자들의 증언내용 조서. 빨간선 테두리 안의 내용은 4.3당시 경찰관을 지낸 김병규씨의 증언내용으로 한백흥 선생의 무고한 죽음을 증언했다.

4·3 당시 경찰관을 지낸 함덕리 주민 김병규(78. 함덕리)씨도 지난 2002년 한백흥 선생의 ‘4·3희생자’ 등록신청시 보증인으로 나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알렸었다. 당시 김병규씨는 “한백흥 선생은 당시 함덕리장과 3구장을 역임하던 중 1948년 11월1일 함덕리에 주둔하던 9연대 군인들이 주민들을 함덕리 평사동 모래사장에 집합시킨 일이 일어났다”면서 “군인들은 청년 여섯명을 무장대라며 총살시키려 하자 한백흥 선생이 신원보증을 하며 만류하자 청년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총살당해 희생됐다”고 말했다.

▲ 해방후인 1947년 초대 함덕리장으로 임명받았던 임명장.

김 씨는 또 “이런 사실은 당시 한경면 두모 지서의 순경으로 있던 내가 함덕리로 와서 동료 경찰관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고 덧붙였었다.

▲ 지난 2002년 4.3희생자 결정 통지문. 한백흥 선생은 손자들에 의해 4.3희생자로 등록됐다.
한백흥 선생은 지난 2002년 11월에 정부로부터 4·3희생자로 정식 등록됐다. 할아버지를 4·3희생자로 신청했던 한하용 씨는 내친김에 사촌동생 형범씨와 2004년에 다시 할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2005년 3·1절에 맞춰 이뤄진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통보를 국가보훈처로 받아 보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보훈처로부터 자세한 사유도 듣지 못했다.

한하용씨는 “독립유공자 선정이 되지 않는 이유는 4·3희생자라는 이유밖에 없다. 그런데 정부가 4·3을 명예회복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4·3희생자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에 선정하지 않는다면 병주고 약주고 하는 것인가?”라면 분통함을 표현했다.

한하용 씨는 또 “할아버지는 해방이후에도 함덕리장을 지내시는 등 국가에도 충분히 협조했는데 왜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아직도 4·3희생자라는 굴레가 이렇게 무거운데 누가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겠는가. 자손으로서 참 죄송스럽고 억울하다”며 “혹시라도 경찰이 할아버지에 대한 좌익활동 기록이 있다면 공개해야 하고 그것은 분명한 허위임을 증명해 내겠다”고 했다.

▲ 한백흥 선생의 손자 한하용씨가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독립유공자로서의 진정한 명예회복이 이뤄질때까지 할아버지는 편안히 눈감지 못하고 계실것"이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함덕 대동청년단장을 지내며 우익활동에 앞장섰던 한재원(82. 전 제주도의원)도 최근 <제주의 소리>와 인터뷰에서 “4·3당시 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상당부분 엉망이다”라며 “그 기록을 근거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좌익이나 남로당원으로 몰아서는 안된다”고 증언한 바 있다.

손자 한형범 씨도 “할아버지는 혈기 왕성한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일제경찰에 붙잡혀 구금당하셨다. 물론 징역 4개월 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보름만에 풀려나시긴 했지만 분명한 공적이 있는데도 보훈처는 공적이 약하다고 하면서 추가 공적을 제출하라는 말을 들었었다”면서 억울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들 형제는“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이 4·3사건을 국가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로 공식인정하고 사과까지 한 마당에 일제시대 만세운동으로 항일에 앞장서다 형 집행을 받으신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추서 받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광복회 제주지부 부익재 회장도 한백흥 선생과 관련해 “형량이 부족하다거나 기타의 이유들로 한백흥 선생의 독립유공자 선정 불가는 말이 안된다”며 “당시 조천만세운동을 함덕리에서 주도했고, 특히 4·3 당시는 무고한 마을 청년들을 구하려다 억울한 죽음을 맞은 희생자인데 당연히 그분의 공적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하용 씨가 마지막이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 한백흥 선생의 손자 한하용 씨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난후 우리 가족의 삶은 한 마디로 비참했습니다. 물론 우리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주민학살이후 사람들은 마룻바닥을 뜯어내 숨어 살았고, 저희도 집뒤에 토굴을 파서 생활했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울음을 터트리면 ‘뚝, 그치라! 헌저! 제발 그치라! 우리 몬딱 죽나!’하시면서 제 입을 틀어막던 어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몸도 마음도 짓눌린 채 살았던 세월이 있습니다. 저 세상에서 지켜보았을 할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천갈래 만갈래 찢어졌겠습니까? 한시라도 할아버지의 진정한 명예회복이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할아버지 영전에 독립유공자 훈장을 바쳐 드려야 그 분도 편안히 영면하지 않겠습니까?”

59주년을 맞은 금년 4월3일은 몹시 차갑고 센 바람이 제주의 산야를 헤집고 다녔다. ‘4·3의 바람’이다. 아직도 실재하고 있는 ‘4·3희생자’라는 일종의 사상검증이 사라지고 진정한 명예회복이 되는 그날까지 저 바람은 더욱 예리한 날을 세워 다시 찾아올 것이다.

제주의 소리는 4.3에 연루됐다는 이유만으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는 유사한 사례를 제보받습니다. 이 같은 아픔을 겪는 유족이나 이를 알고 있는 독자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가 진정한 4.3명예회복을 이뤄나갑니다. (webmaster@jejusori.net  064-711-7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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