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로 되돌아본 제주] (3) '태움'에 노출된 간호사들..."특유의 조직문화" VS "권력 남용 폭력"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피해 폭로 이후 미투(Me Too, 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문화예술계와 정치권, 종교계 등을 비롯한 사회 전방위로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도내에서도 지성의 산실인 상아탑에서의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는 등 미투 운동 확산 조짐이 역력하다. 그러나 미투 운동이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문화와 성폭력에 국한돼선 안된다. 각계각층에 만연돼 있는 ‘권력을 남용한 폭력’에 대해 “피해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우리가 함께 연대할 것”이라는 준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취지일 테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제주에서도 각종 성폭력 문제가 다양한 집단에서 제기된 바 있지만 지금처럼 큰 관심과 사회적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제주의소리>가 ‘미투 운동’으로 되돌아 본, 지위와 권력에 의한 제주사회의 각종 부당한 권력형 폭력 문제를 되짚고 그 대안을 진단해본다.  <편집자 말> 

▲ 제주대학교 간호학과 학생들의 나이팅게일 선서.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지난달 15일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20대 여성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비보가 전해졌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하던 고(故) 박선욱 간호사. 그녀의 죽음은 병원 내 간호사 집단 가혹행위인 '태움' 문화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최근 경찰은 '가혹행위 등 혐의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故 박 간호사 사건에 대한 내사를 종결시켰지만, 경찰의 '혐의 없음' 판단이 집단 내 태움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간호사들 간 태움은 오랜 관행처럼 지속돼 왔고, 2018년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미투(Me Too, 나도 고발한다)는 그간 억눌리고 숨 죽여왔던 여성들이 사회 구조에 저항하면서 촉발된 전세계적인 운동이다. 비록 '성(性)'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진 않지만, 간호사 태움 문화도 그간 만연해 있던 '권력을 남용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그 결을 같이 한다.

다만 태움을 바라보는 시각은 저마다 차이가 있다. 이유를 막론하고 괴롭힘 형태의 태움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과 생명을 다뤄야 하는 간호사들 특유의 조직문화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차이를 보이는 모습이다.

◇ 제주에도 만연한 '태움' 사례..."단순한 괴롭힘 아냐"

'태움'은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간호사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은어다. 전국은 물론 제주의 병원에서도 태움은 만연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부분의 태움 사례는 프리셉터(선임 간호사, 사수)와 프리셉티(신규 간호사)가 짝을 이뤄 교육하는 OJT(On the Job Training, 실무 교육) 방식의 교육 중 벌어지곤 한다.

자기 일을 보면서 별도로 신규 간호사의 교육까지 떠맡아야 하는 경력직 간호사의 입장에서는 신규 간호사의 존재 자체가 '추가 업무'로 여겨진 셈이다.

현직 간호사 A씨는 "대학 시절부터 종종 듣기는 했지만 병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태움'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조직문화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목적이 좋다한들 태움은 결국 '괴롭힘'이다. 단순 여흥을 위한 괴롭힘이 아닌 인격 자체를 뭉개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증언했다.

A씨는 "당시 동기가 주사를 제대로 놓지 못해 환자로부터 컴플레인이 들어오는 사건이 있었다. 그 일이 벌어진 직후 사수가 동기의 얼굴에 주사바늘을 들이밀며 옷을 격하게 끄집어 내리면서 '너에게 실습해야겠다'고 위협했다. 얼마 후 그 동기는 병원을 떠났다"고 회고했다.

간호사 B씨는 "태움이 단순히 업무 교육 차원에서 발생하는 구조라면 모르겠는데, 이미 공적인 영역을 떠나 사적 영역의 침해가 숱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강조했다.

B씨는 "사수의 기분에 따라 폭언의 강도가 달라지곤 했다. 사수가 개인적인 일로 야간근무를 마음대로 조정했는데, 혹여 거부하면 다음날은 더욱 혹독한 갈굼이 이어졌다"며 "이건 '생명을 다루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다.

C씨는 태움 문화를 견디지 못하고 어렵게 취직한 종합병원을 사직했다. C씨는 "4년을 힘겹게 공부해 들어간 병원이었는데 오죽했으면 그만 둘 결심을 했겠나. 태운다는 개념은 단순한 괴롭힘이 아니라 욕설과 폭언, 물리적 가해 등이 포함된 것"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C씨는 "당시에는 '내가 정말 이 것밖에 안되는구나' 매일 자책의 연속이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갈수록 심해지는 태움 속에서 자신감을 잃고, 자존감이 훼손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도 태움 문화를 견디지 못한 신규 간호사들의 이탈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신규 간호사들이 1년을 버티면 '돌잔치'를 해주는 문화까지 생겼다. 신규간호사의 사직비율이 높아 생긴 웃지 못할 문화다.

◇ "생명 다루는 업무 환경, 긴장감 늦춰선 안돼"

간호사 경력 17년차인 도내 모 종합병원 간호사 D씨는 업무 환경상 항상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적극 설명했다.

개인적 감정에 따른 괴롭힘은 분명 지양돼야 하지만, 그 간의 사례로 미뤄 소위 '고삐를 조이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D씨는 "태움의 대물림은 쉽게 개선하긴 매우 어려운 문제다. 이번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건을 계기로 왜 태움 문화가 이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왜 태울 수밖에 없는지 구조적인 문제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D씨는 "간호사들끼리는 '작작 좀 태우라게!'라는 말이 일상이다. 후배를 어지간히 갈구라는 말인데, 개인성향 차까지 감안하면 언어 폭력이든, 신체 폭력이든 가하는 입장과 당하는 입장에서 강도 차는 제각각"이라고 문제인식을 같이 했다.

다만 D씨는 "의료 현장에서 환자의 이상 유무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체크하는 것은 의사가 아닌 간호사이기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적어도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태움 문화'가 단순 '구조적 폭력'으로 판단할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력 13년차인 간호사 E씨는 "분명 힘든 과정이었지만 초년생 시절을 견뎌낸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며 "나도 힘든 시기를 겪었기에 초임 간호사들을 태우지 않으려 하면서도 긴장을 늦추기엔 아찔한 순간들이 종종 있다"고 대변하기도 했다.

◇ 결국 구조적 문제, 만성적 인력난 해소돼야

간호사 '태움 문화'는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병원마다 각기 다른 교육시스템, 그리고 인력 부족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태움'이 자리잡게 된 이유는 만성적 인력난 때문이라는 하소연이 파다하다. 간호사 1인당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상당한 상황에서 신입 간호사들을 보다 빨리 적응시키게 하려고 혹독하게 가르치는 문화에서 파생됐다는 설명이다.

D씨는 "보통 도내 종합병원에서 간호사 한명이 하루 케어하는 환자가 15명 안팎인데 이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보면 보통 2~3배 많은 수준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을 다루는 문제이니 어느 한 사람도 소홀히 할 수 없는데, 거기에다 신입 간호사 교육까지 하려면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보통의 경우 간호사 국가고시 발표와 대학 졸업 시기인 2월께 신규채용이 이뤄지고, 각 병원별로 신규간호사 전체 오리엔테이션이 일주일 가량 진행된다.

실제 병동에 투입되는 것은 2월말. 이후 3개월 정도는 프리셉터가 프리셉티를 1대1로 교육 지도하는 시기를 거친다. '태움' 사례가 가장 빈번한 것도 이 시기다. 신규 간호사의 경우 5~6월쯤 돼야 독립적 업무가 가능해지는데, 이 시기안에 교육이 진행되려면 교육강도가 심해지기 십상이다.

D씨는 "의사들도 3월에 신규 인턴이 채용된다. 만일 의사도 인턴, 간호사도 신규일 경우 둘이 세트 플레이를 하면 의료사고 가능성이 높다"며 "신규 의사-간호사가 팀을 이루는 구조 자체도 바로 인력 부족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의료법상 2명의 간호사가 5명의 입원환자를 담당하도록 돼 있지만, 이 기준을 지키는 국내 의료기관은 10곳 중 1~2곳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는 이 같은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한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너무나 열악한 근무환경과 직무스트레스, 태움 때문에 70%의 간호사가 이직 의향을 갖고 있는 현실"이라며 "간호사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돼야 한다. 신규 간호사에 대한 적응 교육기간을 충분히 보장하고, 이 교육기간 동안에는 신규간호사를 정원 인력에서 제외하는 등 신규간호사 교육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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