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56) 태 사른 땅은 내버리지 못한다

* 태 : 탯줄. 안에서 새 생명체를 싸고 있는 난막(卵膜)
* 손다 : 불사르다. 불태우다
* 내불지 : 내버리지. 내불다(내버리다의 방언)

‘태 사른 땅’은 곧 자신이 태어난 곳, 고향을 말한다. 출산 후에 태반은 땅에 묻기도 했지만, 제주에서는 불에 태우는 게 오래된 관습이다.

외지에 나가 살게 되는 경우,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해 망향(望鄕)의 정이 사무쳐 고향을 더욱 잊지 못한다. 근본에의 그리움이다.

유사한 속담이 있다.

“나 땅 가매긴 검어도 반갑나”

텃새이면서도 온몸이 새까만 까마귀는 사람에게 그리 환심을 얻지 못하는 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살면서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에겐 타향에서 보는 까마귀도 옛 생각을 불러 올 뿐 아니라, 녀석이 고향을 마음대로 오간다는 생각에 더없이 반갑기만 하다. 그러니 향수를 자아내는 풍물은 말할 것이 없고 한낱 까마귀 같은 새만 보아도 고향에 대한 정감이 솟아오른다는 얘기다. 고향의 정을 떠올릴 때면 으레 중얼거리게 되는 속담이다. 

낯선 객지에서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났을 때, 무심결 떠오르는 말이 ‘나 땅 가매기’다. 대처에서 길 가다 이뤄지는 우연한 조우, 뜻밖에 만난 반가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이 순간적으로 솟구치면서 나오는 인사말이다. 손을 잡아 흔들다 차 한 잔하며 이런저런 고향 소식을 듣고 정담을 나누게 된다. 참 따뜻한 장면이다.

고향은 태어나 자라고 살아온 곳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것은 생물학적인 탄생이라면, 고향이라는 장소에서 태어난 것은 지리학적인 탄생이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시간이 동일하기에 자연히 어머니와 고향은 하나에 일치한다.

마음속 깊이 묻어 그립고 정든 곳이 고향이다.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기도 하다.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며 정이 머무는 하나의 세계다. 고향이란 말엔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이, 떼려야 뗄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굳어져 있다.

명절 때면 귀성으로 민족의 대이동이 이뤄진다. 오래된 일로 세계가 놀란다. 너나없이 고향을 찾아 귀성하는 바람에 천 만이 북적대던 서울이 텅 비어 공동(空洞)이 된다. 교통 대란에 고생을 감수하면서 고향 가는 길에 나선다. 귀성길 고생길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차나 배를 타고, 비행기로 고향에 가 마중 나온 부모 형제와의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감격이 아닌가. 끌어안고 품어 가며 활짝 웃음 짓는 사람들. 쌓였던 근심걱정도 눈 녹듯 한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게 고향이 갖는 정이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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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나 배를 타고, 비행기로 고향에 가 마중 나온 부모 형제와의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감격이 아닌가.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고향엔 사람만 아니라 산천(山川)이라는 자연도 포함되면서 ‘고향산천’이라 말한다. 고향을 떠나면 이향(離鄕), 타의에 의해 고향을 잃으면 실향(失鄕), 그런 사람은 나그네요, 그 삶은 타향살이이며,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름이 애잔하니 향수요 객수다.

고향에 돌아온 것이 자신의 본 마음이면 귀향이요, 어쩔 수 없으면 낙향(落鄕)이다. 그러니 고향에 그대로 눌러 사는 사람과 떠나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나라에 가 있을 때,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 결에 고국‧조국‧모국으로 확대된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하늘을 잃음이요, 조상과 이별하는 아픔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의 〈고향의 봄〉이다. 고향을 떠나 본 사람이라면 고향을 그리며 몇 번이고 흥얼거렸을 테다. 그렇게 정든 노래다.

흘러간 옛 노래인들 왜 없으랴.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꿈에 본 내 고향〉이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하는 신세를 애처롭게 노래했다. 참 애틋하다.은빛 연어가 떼 지어 폭포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바다에서 자란 연어들이 알을 낳기 위해 태어난 하천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다. 물의 흐름만 세찬 게 아니다. 길목 곳곳에 포식자들이 기다린다. 그럼에도 연어들은 하천으로 돌아가려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인다. 

모천회귀(母川回歸),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 알을 낳으려 함이다. 연어 1000마리 중 살아남는 것은 4마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얼마나 처절한가. 그래도 연어의 모천회귀는 계속된다. 그들의 본능이다.

“태 손 땅 내불지 못헌다”

한낱 물고기도 제가 태어난 하천으로 돌아가려 목숨을 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임에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종교도, 사상도, 이념도 초월한 것, 인간이 간직하는 가장 순수한 감정, 근원에의 그리움인 것을.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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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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