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의 시네마 줌⑧] 스티븐 스필버그의 「터미널」

내심 카트린 브레야 감독의 「팻 걸」을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약속이나 한 듯 대구지역을 스쳐지나갈 뿐, 한참을 기다려도 개봉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하고 고민하다 「터미널」로 가본다. 스티븐 스필버그, 톰 행크스, 캐서린 제타존스, 스탠리 투칡. 인물들이 화려하다. 그래서 망설여진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광고문구다. 그 광고문구가 머뭇거리던 발길을 안으로 끌어당긴다.

 "나보스키 씨?"
 "예."
 "따라오십쇼. 댁 나라에 쿠데타가 터졌오. 크로코지아는 이제 없는 나라요."
 "크로코지아! 오케이!"

황당한 일이다. 떠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라가 없어지다니……!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다. 자신의 국가가 유령국가가 되어버린 것처럼, 여권과 비자가 효력을 상실한 나머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처럼 현실은 현실이다.

암담한 현실도 잠시잠깐. 깡통 속에 담아온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보스키(톰 행크스 분)는 JFK공항 환승라운지 귀퉁이 공사장 구석에 둥지를 튼 뒤 적응훈련에 들어간다. 영어라고 해야 고작 '예스'가 전부지만 공항 내 서점을 들락거리며 영어도 배우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빈 손수레를 한곳으로 모아 그 푼돈으로 햄버거도 사먹고, 자신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친구도 사귀게 된다.

   
톰 행크스의 익살맞은 연기가 빛을 발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 공항 대합실을 유유히 활보하는가 하면, 스파이가 아니냐는 그 동안의 오해를 한 차례 엑스레이션 통과로 담판 지어버린다. 그렇듯 나보스키는 공항의 잡일꾼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인 청소부, 히스패닉계, 음식배달원과 포커를 즐기는 여유까지 부린다.

나보스키의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해 가장 못마땅한 시선을 쏘아대는 사람은 공항안전관리국 책임을 맡고 있는 프랭크(스탠리 투치).

 "저 인간이 정말! 공항이 자기 집 안방인 줄 아나?"

국장 승진을 코앞에 둔 그에게 나타난 나보스키는 골칫덩어리가 아닐 수 없다. CCTV를 통해 지켜보는 그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그야말로 가관인 것이다. 하여 온갖 교묘하고 지능적인 방법을 총 동원해 공항 내의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는 그를 밀어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익살맞은 자의 순진함을 누군들 당해낼 수 있으랴. 승진을 코앞에 둔 프랭크는 냉혹한 현실 앞에 직면해 있으나 나보스키의 하루 하루는 동화의 나라로 둔갑한다.

이민자 출신의 공항 잡일꾼들에게 잃었던 꿈을 되찾아줌과 동시에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해후가 이뤄진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조세핀을 좋아하는 그 남자의 이름은 나보스키,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그 여자의 이름은 승무원 아멜리아(캐서린 제타존스). 나폴레옹을 사로잡았던 파리 사교계의 꽃답게 승무원 생활 20년째로 접어드는 아멜리아는 가식이 없다. 사치스런 낭비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관계로 나폴레옹에게 버림당했던 조세핀처럼 그녀는 열정의 섹스를 받아들이고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당신은 누구를 기다렸어요?"
 "내가 말했죠.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대화에서의 여운은 절반의 약속이자 절반의 이별로 다가왔던가. 아멜리아는 나보스키를 향해 당신은 누구를 기다렸느냐고 묻자 나보스키의 대답은 사뭇 시적이고 철학적이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이곳이 터미널인 탓이리라. 만남과 이별, 기다림과 만남이 공존하는, 두 개의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곳이 터미널이 아닌가.

   
승무원인 그녀처럼 동으로도 서로도, 남으로도 북으로 갈 수 없는 나보스키는 그제야 비밀스레 간직해 온 깡통을 연다. 깡통 속에는 한 장의 흑백사진이 들어 있다. 흑인들의 아리랑인 재즈가 들어 있고, 아버지와의 약속이 들어 있고, 그리고 렉스톤 161이 들어 있다. 마침내 조국인 크로코지아의 내전이 끝나고 휴지조각으로 둔갑했던 여권에도 꿈을 이룰 파란색의 입국승인 도장이 찍힌다.

조국을 떠나온 지 벌써 9개월째, JFK공항에 갇혀 산 지 어느덧 9개월째. 터미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뉴욕엔 눈이 내린다. 택시를 타려다 눈바람 속에서 마주친 그녀, 아멜리아. 손 흔드는 사랑은 거기까지지만 아버지와의 약속은 아직 남아 있다. 재즈단원 57명 중 56명으로부터는 서신을 통해 사인을 받아냈으나 단 1명의 사인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의 그 꿈을 이뤄주고자 렉스톤 161번가로 향하는 나보스키. 호텔 안 자그마한 재즈 홀로 들어섰으나 사인을 받아내야 할 그는 지금 공연중이다.

 "당신, 내가 말했죠.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동화 속 휴머니즘 그것마저 작위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일까?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뉴욕이 아니다. 눈 내리는 겨울도 아니다. 8월 끝자락 뙤약볕에 꼬리를 물고늘어지는 건 드골공항과 그 공항에 갇혀 무려 11년을 지낸 한 이란인의 모습뿐이다.

   
※ 필자인 박영희 시인은 1962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태생으로 1985년 문학 무크 「民意」로 등단, 시집 「조카의 하늘」(1987), 「해 뜨는 검은 땅」(1990), 「팽이는 서고 싶다」(2001)를 펴냈으며, 옥중서간집 「영희가 서로에게」(1999)도 있다. 시론집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와 평론집 「김경숙」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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