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전 회장 인터뷰①]"선거 패배했지만 경험하지 못한 음지를 배웠다"

5.31 지방선거가 끝난 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전 한나라당 도지사 후보였던 현명관 전 삼성물산회장이 최근 분주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분분하다.

차기(?)를 염두에 둔 정치재개를 준비한다느니, 2007년 대선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는 등 갖가지 추측들이 나돌고 있다. 하지만 현명관 전 회장측은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 “한마디로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있다. 제주에 자주 내려오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현 전 회장이 5.31 지방선거 당시 도민들과 약속했던 것들 중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 지 챙겨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정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저런 말들이 나도는 상황에서 현명관 전 회장을 직접 만나는 것도 좋을 듯 했다. 비록 낙선하기는 했지만 김태환 지사와 숨 막히는 혈전을 벌였던 유력한 정치인(?)으로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는 지역사회의 충분한 관심거리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추석연휴를 제주에서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지 직전인 11일 오후 제주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현 회장을 만났다. (전 도지사 후보란 명칭도 있기는 하지만 선거에 떨어진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자꾸 확인시키는 것 같아 전 회장이란 표현을 쓰기로 했다.)

   
 
 
무엇보다 선거가 끝난 지 4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현 전 회장은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가 궁금했다.

“선거를 한번 해보니 마음의 빚을 잔뜩 진 빚쟁이가 되더군요. 선거 직후 병원에서 잠시 건강 체크를 한 것을 빼 놓고는 대부분 선거기간 동안 도와주신 분들을 만나 고마웠다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보냈습니다. 제주에서 서울에서, 심지어는 일본에 있는 지인들까지 찾아뵙고 ‘많이 도와줬는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미안하다’는 인사를 드렸죠. 그게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선거기간 동안 도민들에게 약속했던 것들 중에 비록 낙선은 했지만 나름대로 지킬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선거 때도 말했지만  ‘도지사 당선’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일 때문이었죠. 어떻게 하면 제주를 잘살 수 있는 고향으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고, 가장 빠르고 손쉽게(?) 할 수 있는게 도지사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와 그동안 보고 느낀 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배웠다. 떨어졌지만 인생의 폭은 넓어졌다"

현 전 회장은 인터뷰 내내 ‘선거기간동안 배우고 느낀 것’을 강조했다. 그가 제주에 보낸 시간은 선거 기간을 포함해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략 7~8개월. 서울에서 대기업 CEO로 생활했던 그가 이 기간 동안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정말 많은 공부와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생활해 왔던 기업에서는 도저히 맞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서울로 유학가서 공부하면서 (행정)고시를 패스하기 까지는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고시를 패스하고 공직생활을 하고 삼성에 들어간 이후 솔직히 양지생활이었죠. 그런 쪽으로만 살아왔으니 삶의 절반밖에 경험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나머지 음지를 경험을 하지는 못했지만 들고 보기는 했습니다. 떨어졌지만 그만큼 인생의 폭이 넓어졌다고나 할까요.(현 회장은 이 대목에서 큰 웃음을 지었다)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현 회장은 지방선거 과정에서 느꼈던 것을 ‘음지’라고 표현했다. 삼성그룹 생활에 대비되는 표현일 것이다. 현 회장의 ‘음지론’은 계속된다.

“솔직히 말해 공무원도 고시를 패스했으니 사무관에서부터 시작했고, 삼성에서도 부장부터 했으니 밑의 애로는 잘 모른 채 지시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는 어떤 경우에는 면전에서 반대하는 사람, 명함을 찢어 버리는 사람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인격적 수모도 맛봤습니다. 내 자신을 수양하고 뒤돌아보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경험은 힘들고 어려운 농촌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큰 보람이라면 보람입니다. 선거가 아니었다면 결코 눈여겨보지 못한 일들이었을 겁니다.”

현 전 회장은 현재 제주에서 생산된 농수축산물을 대도시 대형판매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유통시스템을 만드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달 말이면 구체적인 결실을 맺을 것이란 소문이다. 주변에서는 ‘친환경농산물 전도사’란 다소 오버된 표현도 쓰고 있다. 

'제주농수축산물 유통시스템 만드는 역할 치중…직접 개입하지는 않는다'
 

   
 
 
“위기감을 봤습니다. 선거기간 내내 농촌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위기’였습니다. 제주도 농촌이 ‘노인촌’이 될 것 같다는 위기였습니다. 열심히 일들은 하는데 수요를 잘못 예측하고, 판로를 확보 못해 제값을 못 받고 심지어는 밭갈이하고는 것을 보면서 유통시스템을 바꿔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삼성그룹에서 인간관계를 가져왔던 계열사 사장들을 만나 도움을 청했습니다. 삼성 분당백화점, 삼성 홈플러스, 그리고 에버랜드 사장을 만나 제주도 농촌현실을 이야기하고 농수축산물을 구매한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본부장들도 만났고 과장 팀장들을 제주도 초청해 몇 차례 농민과 조합장들을 만나 실태파악과 의견교환과정을 거쳤습니다.”

현 전 회장은 이들과 3가지를 합의했다고 전했다. 먼저 현재 구입하고 있는 제주농수축산물물량을 20% 늘리는 것, 백화점에 친환경농수축산물 코너를 만들어 제주 친환경농수축산물을 판매하도록 하는 것, 세 번째는 백화점에서 1년에 한 두 차례 제주특산물전을 열도록 했다. 이 같은 농수축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제주현지에서 친환경 농산물 재배농가들을 중심으로 영농조합법인 ‘제주생명살림’을 만들었다. 오는 30일 먼저 삼성 홈플러스와 업무제휴 협약을 맺어 11월1일부터 농수축산물을 공급하게 된다.

이야기가 이쯤 나가자 혹시 ‘차기(?)’ 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행보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기자 생리상 어쩔 수 없이 ‘색안경’을 낄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런 의문이다. ‘농민-현명관-삼성’이란 그림이 떠올랐다.

“저가 맡은 일은 여기까지 입니다. 더 이상 개입하면 오해를 합니다. 순수한 의도로 시작한 일을 (정치적 행사로) 훼손되기는 싫습니다. 생산자와 구매자가 만나 협의체를 만들어 서로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협의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까지만 저가 관여합니다. 그 이후는 양쪽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저는 가교역할만 하고 손을 뗄 것입니다. (30일) 협약식에는 저는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 저와 삼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물론 저의 얼굴을 봐서 한 두 차례는 만나줄 겁니다. 그러나 기업은 자신들의 이익이 안되는 일은 안합니다. 저가 이 일을 제안하긴 했지만 자신들도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봐합니다. 그게 기업의 생리입니다.”

제주가 잘사는 방법은 지금부터 차세대 지도자들을 키워야

이야기가 무르익으면서 제주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현 전 회장은 마음속에 준비하고 있는 '생각 보따리'를 조심스레 풀어 놓았다. 선거기간 내내 이야기 했던 ‘차세대 지도자 육성 플랜’이었다. 마쓰시다 정경숙(政經塾)이 떠올랐다. 마쓰시다 정경숙은 일본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다. 삼성이 인재육성 프로그램을 강화해 지금의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도 사실은 고 이병철 회장이 마쓰시다 정경숙을 배우면서 시작됐다.

“정말 제주를 위한다는 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농수축산물 유통망을 만든다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제주도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점은 우리 세대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대한민국에서 현재는 잘사는 순위로 따진다면 12~13번째인데 5등 이내로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열심히 하면 들어갈 수도 있죠. 그렇다면 우리세대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다음 세대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을 경쟁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 책임이 우리세대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잘사는 방법은 청소년들을 서울과 부산은 물론, 일본과 중국의 동년배들보다 더 경쟁력 있는 인재로 만드는 겁니다. 그게 키(KEY)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현재 우리 청소년들이 그런 경쟁력이 있느냐. 냉정하게 본다면 ‘아니다’ 라는 거죠. 이 문제를 해결 못한다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우리가 목표로 하는 동복아시아의 제일 잘사는 섬은 만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을 내일의 지도자로 육성할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주 청소년들을 경쟁력있는 지도자도 키우는 교육프로그램 준비 중'

   
 
 
현 회장은 이왕 나온 김에 자신의 구상을 좀 더 구체화시켰다.

“아직 구체화 된 바는 없습니다. 우리가 자랄 대는 어떻게 하면 육지에 나가서 ‘큰 물’을 먹을까', '고학을 하더라도 나갈까'하는게 꿈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전 정신이 충만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 꿈과 희망, 창의성을 심어주고 세계가 넓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이 나름대로 도전정신을 키울 수 있도록 말이죠. 국제적으로 비슷한 또래와 네트워크도 자연히 구축되겠죠. 세계를 상대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살수 없다는 인식, 사막인 라스베가스에 몇 천만 명이 사는 도시가 만들어지고, 40도가 넘는 두바이에 스키장이 만들어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세계가 엄청나게 변하는구나,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기존에 있는 리더 육성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면서 연말까지는 기본계획을 짜고 내년부터 가시화하고 싶습니다.”

현 전 회장의 구상은 결국 제주를 이끌 엘리트를 육성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는 유난히 엘리트를 강조한다. 이는 5.31 지방선거에서 ‘불균형발전론’으로 비화돼 쟁점화 되기도 했었다. 그는 여전히 ‘엘리트론’ ‘불균형발전론’에 강한 확신을 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유행가처럼 퍼진 게 소위 ‘균형발전’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어느 선진국이 균형발전에 의해 국가를 성장시킨 사례가 있습니까. 결과론적으로 균형발전이 됐지만 과정은 불균형발전 전략이었습니다. 선두주자를 발전시켜 놓고 낙후지역을 끌어 올리는 전략이었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영국, 일본, 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전 국민을 한꺼번에 2만불로 끌어 올립니까. 불가능 합니다. 다만 그 갭을 어떻게 점점 축소시켜 나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처음 개화하려 했을 때 일본으로 보낸 게 신사유람단이었습니다. 일본도 명치유신을 했을 때 미국을 돌아보고 나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주의 차세대 지도자들도 세계가 넓다는 것을 보고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삼성이 글로벌체제를 구축하게 된 것도 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인터뷰가 진행된 1시간 내내 그는 조용하게 이야기 했지만 대단히 열정적이었다. 마치 5.31 지방선거당시 유권자를 만나 자신의 정책구상을 쏟아내는 것처럼. 현 전 회장은 5.31 선거에서 패배한 후 기자들과 만난자리에서 “선거에 졌다고 해서 고향 제주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약속의 일환이든, 아니면 정치적 행보의 일환이든 어쨌든 제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