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야고,

   
 
 
억새에 기생하는 1년생 식물입니다.

   
 
 
엽록소가 없어 광합성작용을 하지도 못합니다. 억새의 영양분을 뺏아먹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욕하지는 마세요.

내가 아무리 억새의 영양분을 뺏아온다한들 저 예리한 무기를 지닌 나의 주인 억새는 꿈쩍도 안합니다.

   
 
 
나도 그리운 이가 있습니다.

한 발자욱 밖으로 내밀어 외도하고도 싶은데, 저 무시무시한 무기를 지닌 억새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범위를 벗어나면 난 굶어 죽어야하는 운명으로 태어났지요.

   
 
 
내 마음을 아실 이 그 누구련가,

   
 
 
그래도 요즘은, 나를 어여쁘다 여기며 찾아주는 인간들이 있어 행복한 시간입니다.

   
 
 
때로는 한탄, 때로는 푸념.

타고난 팔자인 걸 어떡하랴 운명에 맡겨보지만

   
 
 
그래도 한 끝 서러움은 어찌할 수가 없어 꺼이꺼이 흐느껴 울 뿐입니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나에게도 님을 그리는 암술이 있습니다.

님에게로 갈 수 없는 기생이라 할지언정 이토록 정분에 목이 말라 안달하다 못해 짓무르고 있습니다.

   
 
 
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 몸은 어느 덧 헛된 열매 하나 잉태했습니다.

막연하게 그리던 님과 인연 맺지 못한 증표로 남긴 상상임신은 아닐런지요?

   
 
 
억새가 있는 한 나는 내년에도 다시 태어날 겁니다,

한 낮 꿈을 잃지 않는 곱디고운 연분홍빛으로 단장하고.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몸살이 나신 시부모님 두 분을 당직병원에 모시고 가선 링겔을 맞는 동안 산으로 튀었습니다.

급기야 그곳에서 그토록 오메불망 그리던 야고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온 몸이 가려워 혼났습니다.

왜인가 해서 봤더니 야고를 찍노라 정신없이 바닥에 엎디진 동안 개미에게 숱하게 물리고 가시에 긁히고 온통 상처투성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웠음은 풍성한 한가위 수확이었기 때문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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