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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극단 이어도의 연극 <몽골 익스프레스> 출연 배우 박진우(왼쪽), 강명숙 씨. ⓒ제주의소리

[리뷰] 극단 이어도 연극 <몽골 익스프레스>

‘퍽퍽한 생을 견디는 유랑의 나날들’

제주 극단 이어도가 15일 첫 선을 보인 창작 연극 <몽골 익스프레스> 소책자에 적힌 문구다.

작품은 현대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젊은 소시민 남녀 두 명의 이야기다. 

직업도 집도 좀처럼 진득하니 이어가지 못하는 여자, 그런 여자의 이사를 매번 도맡는 이삿집센터 사장 남자. 넉넉함, 여유와는 거리가 먼 두 사람. 삭막한 도시 안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쳐가는 두 사람. 작품에서는 남녀의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으니, 말 그대로 ‘퍽퍽한 삶을 견디는’ 제법 쓸쓸한 분위기다.

이야기를 반갑게 주고받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견딜 수 없는 소음처럼 느껴진다며 이사를 가고, 하루 지난 냄새가 집에서 가시질 않아 스트레스를 준다며 또 이사를 간다. 도서관에 온 사람들이 책 위치를 물어보는 게 싫어서 도서관 일을 그만둔다. 여자는 까칠하다. 

한 때 괜찮은 기업에 입사할 만큼 능력도 있었지만, 돌아보니 철없는 도전에 실패를 거듭하며 지금은 작은 트럭 하나로 이삿짐을 나르는 처지. 잘 살아보고 싶어 나름 긍정적인 자세로 열심히 발버둥 쳤지만, 현실은 남아있는 가까운 후배 직원 하나마저 떠나보내며 처지를 비관한다. 남자는 지쳤다. 

남녀는 묘한 인연으로 이어진다. 여자가 세 번째 이사를 하는 동안 우연인지 필연인지 남자가 매번 일감을 맡았다. 덕분에 남자는 여자의 포크가 몇 개 인지, 없던 우산과 가습기가 생겼는지 같은 소소한 살림살이부터 남자친구 소식까지 줄줄 꿰고 있다.

<몽골 익스프레스>는 고달픈 처지라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두 사람을 정 반대의 성격으로 설정했다. 계속해서 떠나려는 여자와 머무르려 하는 남자라는 캐릭터를 대비시킨다. 

세 번째 이사를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조언에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대응한다. 감정의 골이 깊어져 결국 이사 계약을 취소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여자 : 다른 이삿집센터를 못 구해서, 남자 : 여자 집에 옷을 두고 와서)로 재회한다. 어색하게 컵라면을 함께 먹으며 다시 물꼬가 트인 대화는 한층 긴장이 풀렸고, 각자가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서로 다른 방식을 공유하며 이사를 마친다.

한 시간 남짓 공연 시간 동안, 작품은 날카롭게 감정의 칼날이 부딪치고 나서, 가슴 속 깊은 속내를 하소연할 기회조차 없는 고립된 현대인의 표상을 잔잔히 비춘다. 고성이 오가고 오열하는 장면도 일부 있지만, 이 작품은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감정을 대놓고 쏟아내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을 감각적인 대사로 대신하는데, <몽골 익스프레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대사다.

“나는 오목한 곳이 없는 사람이다. 내게 고여 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 같다. 갈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여줘야 하는 이런 이사”
“고양이, 쥐 생각에 송구스럽다.”

기자가 분명 대본과 틀리게 기억해 적었겠지만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는 마치, 언어유희 같은 대사들은 꽤나 인상적이다. ‘주어+동사+서술어’를 딱딱 맞춰 가는 대화가 아닌, 과감하게 생략하고 툭툭 던지는 말은 마치 젊은 작가가 쓴 현대 소설책을 읽는 듯 무척 흥미로웠다. 

더불어 관객 입장에서 듣기에 ‘저건 정말 연극에서나 등장하는 말’이라고 느낄 만한 일명, 연극 언어와 일상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는 언어를 적절히 균형있게 사용했다. 전자의 비중이 높아지면 기자처럼 아직 연극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고, 후자의 비중이 높아지면 익숙하긴 하나 무언가 가벼워 보이곤 하는데, <몽골 익스프레스>는 그 균형을 잘 찾아갔다고 느꼈다.

이번 작품은 송정혜가 쓰고 연출까지 담당했다. 아는 정보라곤 소책자에 실린 사진 속 ‘젊은 여성’이라는 것 밖에 없지만, 공 들여 극본을 채워나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송정혜는 작·연출 의도에서 “빠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창의적인 무언가를 동경하고, 독려하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럼에도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언제나 귀 기울일 사람들이 있다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믿음을 이 작품에 심는다”고 밝혔다.

한층 가까워진 남녀는 우여곡절 끝에 이사를 마친다. 까칠했던 여자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 그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소통을 간절히 원한다'고 극 말미가 돼서야 남자에게 솔직히 털어놓는다. 늘 같은 박자로 움직이는 평행선이기에 우린 서로 만날 수 없다는 여자에게 남자는 '내가 한 걸음 더 다가가겠다'고 말한다. 요즘 말로 ‘썸’이라고 부르는 인연의 불꽃이 피어날 것처럼 보이지만, 연극은 발화까지 나아가지 않은 채 이삿짐을 빼고 방문을 닫는다.

이런 열린 결말이 누군가에게는 김빠진 콜라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나름의 여운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각자 다르게 외로움을 이겨내는 남녀가 한 발자국 정도 서로를 이해했다는 진전만으로 작은 온기를 느낀다.

여자 역의 배우 강명숙은 신경질적인 반응부터 ‘츤데레’ 같은 모습까지 감정의 변화를 매끄럽게 소화했다. 남자 역의 박진우 역시 도시에서 방황하는 슬픔부터 둥글둥글 하게 여자에게 다가가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몽골 익스프레스>를 보고 나오니, 어둠이 깔린 중앙로 거리가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 거리 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그리고 이어지지 않은 끈이 있는 듯 보였다. “부디 이 극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소책자 속 작가 겸 연출자의 바람을 한 번 더 읽어본다.

<몽골 익스프레스>는 2월 15일부터 24일까지 금·토·일요일에 미예랑 소극장(제주시 중앙로 72 지하 1층)에서 공연한다. 금요일은 오후 7시, 주말은 오후 4시·7시에 공연한다.

관람료는 1만5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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