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05) 약 사러 간 놈 초우제날에야 온다

* 사래 : 사러(고), 구입하러(고)
* 초우젯날사 : 초우제날에야

아픈 사람 구완한다고 약 사러 간 사람이 초우제 지내는 날에야 돌아온다는 말이다. 초우제는 장례를 마치고 난 뒤에 치르는 제례다. 사람이 죽어 초우제 의식까지 지낸 뒤에야 약을 가지고 온다는 얘기이니, 늦어도 한참 늑장 부렸다. 약을 제때에 지어 와 먹였더라면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환자가 몰(沒)한 뒤에 왔으니 무슨 소용인가. 
  
소임을 다하지 못해 그만 일을 그르치고 만 것을 어리석다 해서 ‘사후 약방문’이라 우롱한 것이다.

무책임하고 우둔하기 짝이 없음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매사에 타이밍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이른바 골든타임. 거기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일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이다. 때를 놓쳐선 안되는데, 그것은 강한 책임의식의 뒷받침이 있을 때 소기의 성과를 얻어 낸다. 무책임하면 실기(失機)한다. 실기는 곧바로 낭패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사후 약방문(死後藥方文)’이 아닌가. 사람이 죽은 뒤에 약 처방을 써 준다 함이니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는가. 때를 놓치고 난 뒤에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소용이 없다. 헛일, 도로(徒勞)다. 말짱 도루묵이란 시쳇말이 그래서 나온 것일 테다.

장례 후의 의식이 상당히 간소화됐지만 이전에는 우제(虞祭)를 반드시 지냈다. 장사 지낸 뒤 처음 지내는 제사가 초우제(初虞祭)인데, 혼령을 위안하기 위해 장사 당일을 넘기지 않았다. 초우제 뒤에 두 번째로 재우제를, 세 번째로 삼우제를 지냈다. 재우제는 낮에 지내는 것이 원칙이나, 반혼(返魂:장사 지낸 뒤에 신주를 모셔 집으로 돌아옴)이 늦을 때는 저녁상식(上食)과 겸해 지내기도 했으나, 만약 당일 돌아올 수 없어 유숙할 경우에는 도중에 숙소에서라도 지내야 했다. 단, 장례 당일을 넘겨선 안되며, 상주 이하 모두 목욕하되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았다. 특히 삼우제는 초우제, 재우제와는 달리 산소에 가서 묘의 실태를 샅샅이 살피면서 간소히 진설해 올렸다.

지금은 장례 후의 우제가 한데 합쳐 하는 방식으로 간소해진 게 보편적이다. 장례 당일 성분(成墳, 봉분을 이룸)하고 나서 묘소에서 삼우 합제로 지내는 방식이다. 요즘 젊은이들 귀에는 초우, 재우라 하는 제식 자체가 생소할 것이다. 유교적 제례 등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인가. 시대가 취향에 따라서 간편하게 지내는 추세로 흐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후 약방문’은 마음에 새겨 둬야 할 말이다.

이는 조선 인조 때 학자 홍만종의 《旬五志》에 나온다. 때를 놓치지 말고, 장차 어려울 때를 대비해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뜻의 격언이나 속담이 많다.
  
중국 전한(前漢) 시대 유양(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고사로, ‘망양보뢰(亡羊補牢)’가 있다. 양을 잃고 나서야 우리를 고친다 함이다. 양도 없는데 우리를 고쳐 봐야 헛수고일 따름이다.
  
‘사후 청심환(死後淸心丸, 사람이 죽은 뒤에야 청심환을 찾는다)’ 또한 같은 뜻이다.
우리말 속담에 ‘늦은 밥 먹고 파장(罷場) 간다’, ‘단솥에 물 붓기’도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다. 장이 끝난 뒤에 가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고, 벌겋게 달아 오른 솥에 몇 방울 물을 떨어뜨려 보았자 솥이 식을 리 만무하다.

비판도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에 대해, “소를 잃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라 한다. 소설가 이외수의 반론이다.

소를 잃고 나서라도 외양간을 고치면 다행이 아닌가. 이를 단순한 유머로 흘려들어도 될 일인가. 실제, 소가 도망갔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가 소를 아주 잃는 사례가 적지 않다. 결국 소를 잃었으니 외양간도 고쳐야 한다, 그냥 방치하지 말자는 것이다.

전임자의 잘못된 정책 등으로 인해 후임자가 소를 잃고 난 이후 그가 떠안아 외양간도 고쳤다면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시스템을 개선한다거나 해 잘 운영한다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 진정 선정(善政)을 베풀 것이면 뒤늦은 후에라도 확고한 대책을 강구해야 하리라. 정치하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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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사래 간 놈 초우젯날사 온다.
전임자의 잘못된 정책 등으로 인해 후임자가 소를 잃고 난 이후 그가 떠안아 외양간도 고쳤다면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아닌가. [편집자] 출처=오마이뉴스.
  
개인도 그렇지만 더욱이 공인들이 지녀야 할 사명감은 몇 번이고 마음으로 다짐해야 할 것이다. 말로는 안된다. 뼛속에 사무쳐 진정이 우러나야만 한다. 때를 놓치는 건 사명감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후 약방문은 가슴을 치게 하는 일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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