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64. ‘용서와 화해’의 설 명절을 기대하며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는 설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오랜만에 반가운 가족들이 만나는 이번 명절에는 행복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을까?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감옥에 있는데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 둘이 또 감옥에 갈 것 같다. 그 밖의 많은 피의자들이 줄줄이 철창행을 기다리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사상 초유의 일들이 벌어지니 이젠 웬만해선 놀라지도 않는다. 한 사회나 국가에 경천동지할 일, 파천황의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는 건 결코 좋은 조짐은 아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진 않다.

적폐는 청산돼야 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므로 성역이 없어야 한다. 다만 소도(蘇塗)처럼 건드리지 말고 지켜줘야 할 영역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현자는 정치를 “네모 난 그릇에 든 밥을 둥근 주걱으로 퍼내는 일”이라고 했다. 네 귀퉁이의 밥알은 남긴다는 뜻이다. 정치는 대범한 면이 있어야 한다. 적폐청산을 사생결단하듯 해서 끝장을 보겠다는 것은 현자의 정치와 거리가 있다. 

히틀러의 충복 아이히만이 전범 재판을 받을 때 한 유태인이 증인으로 나왔다가 늙은 아이히만의 순진하고 평범한 얼굴을 보고 “그를 죽이고 싶었는데 실은 나도 아이히만의 직책에 있었으면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글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은 누구나 그 상황, 그 자리에 있으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다.

티베트인들이 살아 있는 부처라고 추앙하는 달라이 라마는 “불교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비다. 자비는 무엇인가? 용서다”라고 간결하게 불교의 핵심을 정리했다. 예수는 제자 베드로가 “죄인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일곱 번 씩 일흔 번 용서하라”고 했다. 7×70=490번 용서하라니, 끝없이 용서해주라는 이야기다. 용서에는 데드라인이 없다는 말이다.

영어로 용서를 ‘Pardon’이라고 하는데, don은 라틴어 donum(선물)에서 나왔다. 선물처럼 거저 주는 게 용서다. 그리스어로 용서는 ‘자신을 풀어주다, 자유롭게 하다’의 뜻을 지닌다. 그러니까 용서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 받는 자, 둘 다 무거운 짐(죄, 원망)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해야만 한다. 사람이 미움과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을 해치기 전에 자신부터 먼저 병들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간디는 자신을 폭행한 폭력배들을 석방해주도록 재판관에서 요구했고, 교황 바오로 2세는 자신을 암살하려던 범인을 감옥으로 찾아가서 손잡고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선언했으며,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자로 입양했다. (용서는 위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보통 사람들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다.)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의 대통령이 된 뒤에 자신을 27년간이나 감옥에서 썩게 한 파렴치한 권력자들을 용서해 주었다. 그 결과, 남아공에 평화를 가져왔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민족정기로 승화하는 계기가 됐다.

용서의 극치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공짜로 우릴 용서해줬다. 그러니 우리도 마찬가지로 타인을 값없이 용서해줘야 한다.

▲ 장일홍 극작가. ⓒ제주의소리
전직 대통령이나 대법원장은 물론이고, 이름 없는 필부의 죄악까지도 관용의 마음으로 용서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사랑과 평화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야말로 용서와 화해로 우리 시대의 슬픔과 아픔을 넘어서야 할 때가 왔다. 이번 설 명절에는 희망과 웃음꽃이 함박눈처럼 펄펄 날리기를 고대한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