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문호 전북대 전자공학부 초빙교수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본인들의 노력으로 대통령이 됐다. 자수성가로 후성(後成)한 것이다. 풍수지리 명당 이론의 동기감응(同氣感應) 역시 후성유전 현상이다. 동기감응은 조상과 후손은 같은 혈통관계로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감응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제주 하귀 출신 고광림(1920-1989) 박사와 전혜성(1929~) 박사 가족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받은 박사학위가 11개다. 부부의 유전자가 6남매 자녀들에게 대물림 됐는데, 6남매 모두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까지 공부를 마치고, 손자들 역시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했다. 전혜성 박사는 “재능만으로 성공한 사람은 없다. 덕(德)은 사람을 이끈다. 공부는 습관이다. 능력에 걸 맞는 사람됨이 글로벌 인재가 되는 열쇠”라고 말한다. 전 박사는 1948년 아이를 등에 업고 모유를 먹여가며 사회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이 집안을 이야기 할 때 ‘명당 중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애월읍 광령리 과수원 高昌玉(6남매의 증조부) 묘소도 빼놓을 수 없다. 

만일, 경성제국대학, 경기여고, 이화여대를 졸업한 고광림·전혜성 부부가 제주에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4.3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가족의 운명은 어떻게 결정 됐을까? 橘化爲枳(귤화위지)란 중국 고사가 있다. 즉,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南橘北枳(남귤북지)로도 쓰이는데, 남쪽 귤이 북쪽에 오면 탱자가 된다는 의미다. 두 고사 모두 감귤이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후성유전(Epigenetic) 현상이다. 후성유전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영향을 더 받는다. 씨보다는 밭이 좋아야 곡식이 잘 자라지 않은가. 

고광림 박사는 하귀에서 1920년에 태어나, 1945년에 경성 제국대를 나와 4.3사건 즈음에 미국으로 떠났다. 1950년대에 미국 럿커스대 정치학 박사, 하버드대 법학 박사를 받는다. 1960년 장면 총리 시절 주미대사관 공사로 일하다 5.16군사반란이 발발해 미국으로 귀화하고 코네티컷 주립대 교수로 봉직했다. 부인과는 아홉 살 차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정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충남예산의 명문가 자제로 위대한 서예가다. 추사는 55세인 1841년부터 1850년까지 제주 대정 안성에 유배돼 9년 동안 절대 고독과 세찬 모슬포 바람, 거친 음식 속에서 벼루 10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을 정도로 정진했다. 그 결과 추사체와 세한도를 세상에 내놓았다. 

고광림 교수가 제주에서 한양, 미국을 거쳐 두 개의 박사학위를 받고 세계적인 학자로 우뚝 서면서, 부인과 자식들 모두 미국 최고 대학인 하버드와 예일대 박사를 받았다. 반대로, 추사는 한양에서 제주로 유배를 내려왔기 때문에 그의 학문 속에서 꽃을 피웠다. 추사가 제주에 올 때 제주는 임을대기근(1792-1795)이 지나고 제주도민에 대한 출륙금지령(1629-1823)이 풀린 1841년이다. 추사가 제주로 유배오지 않았다면 세한도가 나왔을까? 아마도 벼슬 관직과 세력 다툼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자기 능력을 최대로 해서 그 환경과 일치(match)되는 것이 후성유전 현상이다.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을 돌아보면 세도가 양반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고광림 박사의 기고는 1969년도 저자가 제일고등학교 교사때, 제주신문에 미주통신 고정칼럼으로 연재된 글들을 자주 접했다.   

어릴 때 습관이 평생의 후성유전 현상인 경우를 필자의 사례로 설명한다.

1940년대, 제주 중산간 마을은 너무 척박하고 일손이 딸려 다섯 살 때부터 조밭, 검질을 메러 다녔다. 이랑은 내가 메고 고랑은 할머니가 멨다. 조금 자라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밭을 갈기 시작했는데, 쟁기는 무거워서 어머니가 지고 밭에 놓고 갔다. 검질을 메면서 영어 단어를 외운 기억이 새롭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장학금과 입주 가정교사로 졸업했는데, 당시 하숙비가 쌀 여섯 말이었다. 서른아홉 늦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돼서 2018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38년간 국가의 중요 연구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척박한 환경을 이기려는 습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만 개인 이야기를 더하자면, 가정교사 때 초등학교 5학년생을 가르쳤는데 그 아이는 20년 후 의대 마취과 교수가 됐고 나는 공대 전자과 교수가 됐다. 20여년 전, 아랫배가 아파서 응급실을 찾았는데, 제자였던 의대 교수가 나의 맹장 마취를 했다. 통증의 원인은 아침에 빵 사이에 놓고 먹는 치즈였다. 고향에서 먹는 보리밥과 된장국은 아무리 먹어도 탈이 없는데, 보기 좋아서 먹은 외국산 음식이 탈이었다. 음식은 후성유전 현상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제주의 3대 대기근, 1948년 4.3사건과 후성유전 현상의 관계

제주섬은 3대 대기근으로 한 때 죽음의 섬이라고 불렸다. 경술(1670년)에서 임자(1672년)까지 경임대기근은 제주 인구 4만2000명 가운데 1만3122명이 사망했다. 계정 대기근은 계사(1713년)에서 정유(1717년)로 1만 여명이 사망했고, 임을 대기근은 임자(1792년)에서 을묘(1795년)까지 6만2698명 가운데 1만4963명이 사망했다. 전체 인구 수치로 따지면 24%다.

이에 대한 김오진 박사(세화고 교감)의 눈물 나는 연구보고가 있다. 3대 대기근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개다리왓(田, 밭)’이라는 명칭이다. 제주 안덕면 서광리에 가면 개다리왓이라는 밭이 있다. 대기근 때 굶주림에 밭과 개다리를 바꿨다는 데서 유래했다. 

제주의 3대 대기근 후 불어 닥친 것이 1948년 4.3(1948-1956)이다. 이 역시 피눈물 나는 사건이다. 제주 인구 30만명 가운데 3만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고 중산간 마을 130곳이 불에 탔다. 1946년 대흉년과 콜레라 창궐, 강제 공출부활 등으로 제주는 죽음과 산지옥의 섬이었다. 당시 3~4살 이었던 필자 역시 콜레라로 사경을 헤맸던 기억이 난다. 

4.3사건으로 학살당한 제주 후손들은 3대에 이르면서 당시의 고통, 기아, 스트레스가 오늘날 비만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지 상상해본다.

▲ 4.3사건으로 학살당한 제주 후손들은 3대에 이르면서 당시의 고통, 기아, 스트레스가 오늘날 비만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지 상상해본다. 사진은 4.3 당시 중산간으로 몸을 피한 어린 아이들. 출처=Thoughts of Hyungjk 블로그.

작년 95세로 타계하신 저의 부친인 경우, 술을 전혀 마시지 못했는데도, 세상을 떠나기 전 3년 동안은 술과 친구가 되면서 치매가 왔다. 4.3의 정신적인 트라우마 후유증이 컸다. ‘한 일 두이 석 삼, 하늘 천 따지’를 입에 달고 노래를 부르다 가셨다. 

4.3과 비슷한 예를 세계 역사에서 찾아보면,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4~1945년 독일의 네덜란드 봉쇄로 인한 겨울 대기근을 꼽아본다. 당시 태어난 네덜란드의 아기들(2세대)은 상당수 저체중아였다. 그들이 성인이 됐을 때 당뇨병, 비만, 심장병, 암 발생, 정신분열증 등이 다른 Cohort(동일한 특성을 가진 연구집단)에 비해 유의하게 증가했다. 

1968~1970년 아프리카 Biafra(비아프라) 기아, 1958~1961년 중국의 대기근 후에 태어난 세대에서도 같은 현상이 관찰된다. 이런 연구 결과는 태아가 제한된 영양에 반응한 후성유전학적 적응의 결과로 보인다. 산모의 식생활이 자녀와 그 후손들의 건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같은 결과는 꿀벌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일벌과 여왕벌의 차이는 유전적 차이가 아니라 꿀벌 유충이 먹는 음식의 차이라는 것이다. 꿀벌 유충 가운데 로열젤리를 먹는 유충은 여왕벌이 되며, 그렇지 않은 유충은 일벌이 된다. 즉, 개체가 섭취한 음식이 신분을 만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장기와 성인 시기의 식이습관 역시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스웨덴 우메오 대학의 케이티 연구 그룹에 의해 2002년 수행된 역학 연구를 보자. 사춘기 전 단계의 완만한 성장기에 과식을 했던 세대의 손자들은 과식을 하지 않았던 세대의 손자들에 비해 심혈관계 질환이나 대사성 질환의 유병률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증가했다. 또한 수유 직후 20주까지 고지방식을 섭취한 쥐는 뇌에서 포만감 인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파민 수용체의 과메틸화(그림 1)를 통해 단백질 생산의 감소를 가져왔다. 같은 수준의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음식을 필요로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인 시기의 식이습관 역시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유발하는 주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다. 이런 과학적 결과들은 식품 그리고 식습관이 개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후손의 건강까지 영향을 준다는 걸 잘 알려준다. 곧 우리가 매일 선택해서 먹는 식품들과 우리 식습관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영양과 식품 분야에서 가치 있는 후성유전학적 연구 결과들이 점차 축적되고 있으나, 의·약학 분야의 후성유전학적 연구에 비교하면 음식 문화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초기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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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 후성유전학 : 시토신의 메틸화와 DNA를 감싸는 실타래 히스톤패턴. 제공=이문호, 네이버.

왜, 四多島(돌, 바람, 여자, 비만)인가?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보면 비만에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은 전국적으로 한해 11조5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당뇨와 고혈압 등을 치료하기 위한 비용이 크고, 비만으로 일을 해야 하는 인구의 건강이 나빠지며 생산성도 저하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손실액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0.7% 수준이다. 

제주는 비만의 섬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2015년 기준 전국 시·도별 비만 지도를 보면, 제주 지역 비만유병률은 36.61%를 기록했다. 전년도에 비해 5.48% 증가했다. 고도비만 유병률도 3.40%, 복부비만 유병률도 4.79% 각각 상승했다. 전국 1위다. 지난해 역시 제주는 이 수치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간한 ‘2017 비만 지도’를 펼쳐보면 제주도의 색이 가장 짙다. 건강검진을 받은 성인 1395만명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 제주는 남성 비만율 48.7%로 1위다. 남성 성인 둘 중 하나가 비만인 셈이다. 건강에 직접적인 이상이 발생할 수 있는 고도 비만, 초(超)고도 비만 비율도 전국에서 가장 높다. 여성 비만율도 26.5%로 강원(27.8%)에 이어 둘째다. 오래 전부터 제주는 ‘돌, 여자, 바람이 많다’고 삼다도(三多島)라 불렸지만 요즘은 비만까지 합해서 ‘사다도(四多島)’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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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전국비만율 조사. 제공=이문호, 국민건강보험공단. ⓒ제주의소리

비만율이 높은 이유를 지역 매스컴과 관계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첫째, 제주 주민들은 걷는 대신 차를 자주 탄다. “지역 여건상 지하철이 없고 버스 접근성도 떨어지다 보니 어릴 때부터 차타는 습관이 든 것”이라고 보도한다. 

현재 제주도의 차량 등록 대수는 2017년 12월 기준, 약 48만대로 이 가운데 자가용은 35만7000대다. 나머지는 렌터카와 택시다. 차량 등록만 보면 제주보다 인구가 두 배 많은 울산시(54만대)와 비슷하다. 제주도 203개 동·리 가운데 122곳(60.1%)의 대중교통 접근성이 부족하다는 건 교통안전공단 조사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또 제주도의 버스 한 대당 인구는 2015년 기준 1304명으로 전국 평균(1139명)에 비해 많다. 대중교통이 열악하다 보니 도민들이 자가용을 자주 이용하고, 그로 인해 걸음 수가 줄어들었다는 분석이다.

둘째로는 육류를 즐기는 식습관이다. 제주대 식품영양학과 채인숙 교수팀이 2018년도 제주 지역 1332명의 식습관을 조사했더니 육류 섭취량이 1일 135.5g으로 전국 평균(109.6g)을 훌쩍 뛰어넘었다. 반면, 채소(전국 296.8g, 제주 271g)와 과일(전국 198.3g, 제주 155.3g)은 평균보다 덜 먹었다. 

채 교수는 "제주에는 양돈 농장이 많아 질 좋은 고기를 값싸고 빠르게 접할 수 있다"며 "외식 문화도 발달해 육류나 기름진 음식을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부족한 운동까지 더해 덜 움직이고 더 먹다보니 제주 사람들이 비만 인구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국민건강보험 역시, 비만은 후성유전학(Epigenetics), 즉 유전자와 주위 환경이 원인이 되며 질병이 시초가 된다고 밝힌다.

청정한 공기와 21개의 올레길, 360여개의 오름이 있는 제주. 그동안 제주는 사람이 살기 좋은 장수의 섬으로 알려져 왔지만, 정작 도민들의 건강 실태는 무척 나쁘다. 

3대 대기근과 4.3사건. 그 휴유증이 자손에게 이어지면서 비만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당국은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새해는 도민 후성유전 환경에 대한 건강증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 나갈 때다. / 이문호 전북대 전자공학부 초빙교수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으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RMIT대학, 독일 뮌헨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기술부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 공학부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에 선정됐다.

현재 감귤과 커피나무 유전자 DNA 결합을 후성유전자 현상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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