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98) 소 잡아먹을 게으름을 핀다

* 쉐 : 소
* 간세헌다 : 게으름을 핀다

농부는 하늘도 못 막는다는 부지런한 공으로 산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부지런함, 곧 근면(勤勉)이야말로 농부의 본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근면에는 부지런할 ‘근(勤)’, 부지런할 ‘면(勉)’, 모두 두 글자에 힘 ‘력(力)’ 자가 들어 있다. 있는 힘을 다하라는 것이 근면임을 깨우침이다.

일미칠근(一米七斤), 한 톨의 쌀을 생산하는 데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고 했다. 쌀 미(米) 자를 파자하면  ‘八十八’이 된다. 쌀 한 톨에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간다는 뜻이 녹아 있다. 파종해 김 매고 거름 주고 거둬들여 장만하고. 한 알의 쌀이 웬만한 공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땀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한다.

게으름 피면 제대로 수확을 할 수 없으니, 굶주림을 면치 못할 것이 뻔하다. 결과는 보나마나다. 없어선 안될 소를 어쩔 수 없이 잡아먹어야 할 판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으랴.

게으름을 꾸짖고 나무랄 때 쓰는 말이다. ‘쉐 잡아먹을 간세’라. 묵직한 비유라 실감을 더한다. 

부지런 공은 하늘도 못 막는다고 했다. 척박한 땅에, 비바람에, 가뭄에, 소출이 변변찮았던 옛 선인들의 삶, 그나마 부지런 공으로 땅을 일궈 밭을 넓히고 밤낮없이 기는(일하는) 공으로 식솔들 입에 풀칠하고 아이들 공부시키며 오늘을 기약했지 않은가. 아마 팔도를 통틀어 근면하기로 제주인을 따를 곳이 없으리라.

필자 또한 1950년대에 학교 다니며 겪었던 절대빈곤, 그 적빈(赤貧) 시절을 기억의 곳간에 갈무리하고 있다. 식구를 굶기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던 어머니, 아버지의 부지런한 모습이 생생하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든다.

근면할 것을 거듭 강조한 다산 정약용의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이 있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또 부지런히 하라’ 한 가르침, 그래서 삼근계로 마침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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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쉐 잡아먹을 간세헌다.
농사는 밭에 씨만 뿌려 놓으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에 자란다고 한다.
출처=제주학아카이브, 강만보.

다산이 절망의 순간에 눈물겹게 만난 제자 황 상의 얘기다.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 와 동문 밖 주막집 뒷방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 이듬해, 다산이 현지에 사의재(四宜齋)란 서당을 열었다. 자신의 앞가림도 할뿐더러 절망의 시기를 강학(講學)의 열정으로 채워 보려 한 절박한 심정에서였다.

황 상은 다산이 처음 서당을 열었을 때 무릎을 꿇고 배운 이른바 읍내 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다산의 황 상의 질박한 심성을 무척 아꼈다.

다산은 그때를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황 상에게 공부하라고 권했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더니 부끄러운 낯빛으로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게 세 가지 병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요, 둘째는 막힌 것이요,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다산이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로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이 들뜨는 데 있지. 세 번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 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게 된다. 막혔다가 터지게 되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되거든. 뚫는 것은 어떠해야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을까? 마음을 확고히 다잡아야 한다.”

성실재근(誠實在勤), 성공의 열매는 부지런함 속에 있다. 근즉래복(勤則來福), 부지런하면 복이 (절로) 온다.

“쉐 잡아먹을 간세헌다.” 

참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부지런해도 삼시세끼 먹기 힘든 판에 무위도식, 빈둥빈둥 놀고먹었으니 재산이 남아날 것인가. 야금야금 축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거덜이 나고야 만다. 그래서 내놓은 게 집에 기르는 쉐를 잡아먹기에 이른 것이다. 패가망신이 따로 없다. 사람은 모름지기 부지런해야 하느니.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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