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16) 장 자크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최석기 역, 동서문화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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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자크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최석기 역, 동서문화사, 2018. 출처=알라딘.

1. 인간평등의 시험대로서의 제주

연말이라 각종 송년모임에 나가게 된다. 원래는 번잡한 모임을 좋아하지 않아 잘 참석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소위 ‘사회’ 생활도 해야 하고, 그런 모임에 전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가는 은퇴 후에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어 올해는 억지로라도 몇몇 모임에 얼굴을 내밀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좋지 않았다. 예의라곤 모르는 폭력적인 사회자가 억지로 사람을 앞에 불러내어 내키지 않는 말을 시키거나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시키면, 그 광경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억지스럽고 과장된 웃음을 웃다가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개그맨 뺨치게 농담도 하고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르기도 한다. 참석자들의 인기를 끈 사람은 마치 대중스타라도 된 양 우월감을 뽐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과장된 웃음소리와 몸짓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어야 한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이라는 책에서 학회에 참석한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주도권 싸움을 묘사하며 인기 경쟁을 하는 학자들을 ‘춤꾼’에 비유한 적이 있다. 우열을 가리는 경쟁이 시작되면 이미 송년모임은 놀이터가 아니라 일터가 된다. 루소는 노래와 춤의 경연이 모든 불평등과 악덕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연애와 여기에서 파생된 노래와 춤은 여가를 내어 모인 남녀들의 즐거움이 되기보다 일이 되었다. ....가장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는 자, 가장 아름다운 자, 가장 강한 자, 가장 재치있는 자, 또는 가장 말 잘하는 자가 가장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또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이 최초의 선택으로 한편에선 허영과 경멸이 또 한편에선 치욕과 선망의 감정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효모로 야기된 발효가 마침내는 순수한 행복에 치명적인 불길한 합성물을 낳게 했던 것이다.”
-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99쪽.
노래와 춤에 소질이 없는 사람에게 송년모임이 괴로운 일터가 되는 이유를 루소는 인간평등의 문제와 관련지어 해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것은 필자가 웃자고 한 이야기이다.

좀 진지한 주제로 넘어가면, 올해 제주에서는 평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예멘인 484명이 제주도에 들어와 난민신청을 한 것, 그리고 ‘녹지국제병원’이라는 중국 녹지그룹의 투자개방형 외국병원(외국영리병원)이 도지사에 의해 허가를 받은 일이다. 이 두 사건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그 처리 방향에 따라서 우리 사회가 평등이라는 가치를 좀 더 실현하는 쪽으로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제주도가 대한민국의 정치적 미래를 정할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멘인들의 난민신청을 받아들여 합당한 권리를 부여할 것인가의 여부를 두고 찬반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난민을 받아들일 경우 내국인들의 일자리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루소는 그렇게 손익계산을 따지기 전에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연민을 좀 느껴보라고 말한다. 영리병원의 설립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의료서비스와 관련한 부자의 차별적인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소는 자원과 재화가 부족한 상황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여유 있게 향유하는 것은 명백히 자연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2.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다”

루소는 자연 속에서 살던 인간에게는 애초에 우열의 개념이나 선악의 개념이 없었다고 말한다. 자연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했다는 것이다. 우열의 개념이 없으므로 남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 선이 무엇인지 모르므로 악을 행하지 않는다. 경쟁, 복수, 원한 따위의 감정은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배가 고프면 먹었고, 고통 받는 다른 인간을 보면 연민을 느꼈다. 그것이 자연법이다. 

물론 몇 백 년 전에 인간의 본성을 자기 식대로 추론하여 말하고 있는 철학자의 이야기를 토대로 현실의 문제를 논하기에는 시간적인 거리가 너무 멀기는 하다.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대체로 평등했는지도 알기 힘들다. 그러나 루소가 인간의 사회적인 제도와 법률을 불평등의 기원으로 보고자 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고 믿고 있는 그런 제도와 법률들이 우리를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로부터 오히려 얼마나 멀어지게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이다. 

“사색하는 상태는 자연을 거스르는 상태이며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49쪽) 말하는 루소는 인간이 오늘날 겪고 있는 불평등과 고통의 대부분이 문명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문명인이 칭송해 마지않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즉 ‘지혜’와 ‘이성’ 때문에 인간은 자연 상태의 온화함을 잃어버렸고, 과도한 정념에 휩싸여 고통 받는다. 루소는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84쪽)라고 말한다. 인간이 육체적인 연애만 알고 있다면 심한 애욕 때문에 발생하는 다툼과 잔인성도 없었을 것이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종속관계의 속박에도 묶여 있지 않으며, 불필요하게 복종하는 일도 없다. 

행복하고 온화하며 미개한 자연 상태의 인간은 그렇다면 언제부터 부족한 소유와 낮은 사회적 신분 그리고 강자에 대한 예속 때문에 불평등한 존재가 되었는가?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토지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것은 내 것이다' 선언하는 일을 생각해 내고는, 그것을 그대로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들을 찾아낸 최초의 사람은 정치사회(국가)의 창립자였다. 말뚝을 뽑아내고 개천을 메우며 '이런 사기꾼이 하는 말 따위는 듣지 않도록 조심해라. 열매는 모든 사람의 것이며 토지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는다면 너희들은 파멸이다!' 동포들에게 외친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범죄와 전쟁과 살인, 그리고 얼마나 많은 비참함과 공포를 인류에게서 없애 주었겠는가?”
- 《인간불평등기원론/사회계약론》 93쪽
모두의 땅을 ‘내 땅’이라고 선언한 사기꾼이 등장함으로써 그 모든 불평등은 시작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아쉽게도 그 사기꾼의 정체를 일찌감치 폭로한 영웅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유재산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자연 상태의 미미한 신체적 불평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뛰어 넘을 수 없는 차이로 발전했다. 지배의 쾌락을 알게 된 자는 다른 쾌락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은 각종 기만적인 책략을 동원하여 지배자의 위치에 서고자 경쟁했다. 이리하여 자연 상태의 인간이 누렸을 자유는 파괴되었고, 불평등은 영원히 고정되었다.

루소는 미개인이 안식을 위해 살면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반면, 문명 속의 사회인은 언제나 더 힘든 일을 찾아다닌다고 꼬집는다. 루소가 보기에 문명인은 “자기의 노예 상태를 자랑하고, 그와 같은 명예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여 말한다”(127쪽) 루소의 관점에서 제주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자면, 예멘인들은 특정한 나라에서 온 불청객이 아니라 그저 고통 받는 연민의 대상일 뿐이며, 영리법인의 옹호자들은 지배의 쾌락을 맛본 자, 혹은 맛보고자 하는 자들일 뿐이다. 철학, 명상, 사색이 때로는 단순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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