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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1일 오전 11시 제주지방경찰청에서 故문형순(1897~1966.경감) 전 모슬포경찰서장에 대한 추모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2018년 경찰영웅 선정 ‘1일 흉상 제막식’...한국전쟁 당시 제주 예비검속자 희생 막아

<제주의소리>가 2005년 3월부터 집중 조명한 '한국판 쉰들러' 故문형순(1897~1966.경감) 전 모슬포경찰서장에 대한 추모흉상 제막식이 1일 제주지방경찰청에서 열렸다.

현장에는 이상철 제주지방경찰청장과 안동우 제주도 정무부지사, 김태석 제주도의회 의장, 노현규 평안남도 제주도민회장, 경찰 가족 등이 참석했다.

강 서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강순주(86), 고춘언(94) 할아버지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행사에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제막식은 국민의례와 경과보고, 추모동영상 시청, 제막, 진혼무, 헌화와 분향, 감사장 전달, 기록물 기증, 추모식사, 추도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표선면 가시리 출신인 강 할아버지는 추도사에서 "문 서장의 용단으로 수백여명이 목숨을 구했다"며 "세상을 떠난 많은 분들도 고마움과 존경을 표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 서장의 삶의 이력은 후배 경찰관들에게 무한한 힘이 될 것"이라며 "생을 마칠 때까지 고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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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1일 오전 11시 제주지방경찰청에서 故문형순(1897~1966.경감) 전 모슬포경찰서장에 대한 추모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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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1일 오전 11시 제주지방경찰청에서 故문형순(1897~1966.경감) 전 모슬포경찰서장에 대한 추모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고 할아버지는 “내 살아생전에 내 몸이 아무리 불편해도 이번 제막행사만큼은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생각했다”며 흐느꼈다.

문 서장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했다. 국민부는 남만주 일대 한인을 바탕으로 준 자치를 실시한 곳이다.

그곳에서 문 서장은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을 맡아 조선혁명군의 지원을 통해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9년에는 조선혁명당 중앙당부 중앙위원 23명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문 서장은 광복 후 경찰 신분으로 서울을 거쳐 제주에 내려왔다. 1947년 7월 제주경찰서 기동대장을 거쳐 한림지서장과 모슬포경찰서장, 성산포경찰서장을 지냈다.

1949년 1월 모슬경찰서장 당시 군경이 대정읍 하모리 좌익총책을 검거해 관련자 100여명의 명단을 압수, 다수가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의 자수를 권유하기도 했다. 

1949년 11월 성산포경찰서장이 된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 주민들에 대한 군 당국의 학살 명령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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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삼성혈 삼성전 앞에서 찍은 문형순 서장의 사진. 오른쪽 끝 안경을 쓴 사람이 문형순 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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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8월3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이 서귀포경찰서장에게 보낸 예비 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 당시 문형순 서장은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썼다.
6.25 당시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하라는 이른바 예비검속이 시작됐지만 그는 총살 명령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맞서 대량학살을 막았다.

읍면별로 수백명씩 목숨을 잃었지만 성산읍 희생자는 6명에 불과했다.

문 서장은 경남도경 함안경찰서장을 지내고 1953년 9월15일 퇴직했다. 이후 다시 제주로 내려와 무근성에서 쌀 배급소를 운영하며 가난과 싸웠다. 

영업을 접은 후에는 당시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을 하다 1966년 6월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로 후손 없이 생을 마감했다.

경찰청은 올해 8월 경찰영웅 선정위원회를 열어 문 서장을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다.

문 서장의 흉상은 제주도미술협회 부지회장 성창학 작가가 맡아 제작했다. 흉상은 청동으로 좌대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흉상과 좌대를 합쳐 197cm 높이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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