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89) 범벅에도 금을 긋는다

* 그믓 : 금, 줄

옛날에는 범벅을 만들면 큰 함박에 퍼 담아 가족이 둥그레 상에 둘러앉아 먹었다. 주로 감저(고구마)를 으깨 섞은 모물(메밀)범벅이나 수수범벅 따위의 그것. 가난한 시절의 시골 풍경이었다.
  
한데 그 범벅이란 게 말 그대로 범벅이라 네 몫, 내 몫의 구분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잽싸게 많이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술도 못 떠먹었는데 그만 바닥이 나는 수가 있다. 그러면 비록 한 식구라 해도 공정치 못하다. 낭푼(양푼) 하나에 담아 나눠 먹는 데서 오는 불공정 문제가 나오게 마련이다. 

한 가족이라 해도 굶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면 투덜댈 수밖에 없다. 불평을 터트리거나 독식하는 사람에게 눈 흘기거나 하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애비 아덜(아비와 아들, 부자) 간에도 ‘범벅에 그믓 긋나’라 함도 같은 맥락이다. 부자간에도 금전 거래는 분명히 한다는 것도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끊을 수 없는 천륜(天倫)의 연이다. 그러면서도 실제 분가해서 독립된 살림을 하는 과정에는 아버지 몫이 있고 아들의 몫이 있게 된다. 그쯤 되고 보면, 아무리 혈육지간이라도 그 한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생긴다. 범벅에 금을 긋는다는 게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제 몫에 대한 구분만을 확실히 해 두는 게 후탈을 없애는 길이라는 의미다. 

요즘엔 예전 같지 않아 부모 형제간에 재산을 놓고 다투는 가족 간의 분쟁이 날로 심해 간다.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벽에 걸린 월중행사표에 빼곡히 적혀 있는 메모에 눈이 가, 저게 도대체 뭐냐 물었더니, 변호사 하는 말, “모두 형제간의 재산 분쟁 사건들이지요”라지 않는가. 메마르고 험악한 불화(不和)의 시대다. 
  
범벅에 그은 금같이 애매모호한 게 없지만 그나마 이것저것, 여기저기라 해 엄격하게 금을 그어 놓아야 하는 세상이다.
  
돈 많은 사람은 사후 가족 간의 불목(不睦)을 미연에 막기 위한 방도로 유언장을 쓰는 경우가 많다. 재산 상속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도, 연인 사이에도 반드시 ‘금을 그을 필요가 있다.’ 격의 없이 지내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이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사람의 일 아닌가. 경계를 허물고 네 것, 내 것 없이 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가서 이해가 대립하게 된다. 특히 동업자들 간에. 어쩌면 애초 금을 긋지 않은 게 바로 그 사단을 키운다. 금전을 둘러싼 마찰은 심각한 국면을 부른다.
  
연인 사이도 매한가지다. 지켜야 할 선(線)이 무너지기 쉬운 게 애정을 나누는 사이다. 잘못되면 친구지간보다 훨씬 더 절박한 상황이 될 게 아닌가. 파경이니 파탄이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지만, 그 말이 어떤 말인가. 

‘파경(破鏡)’은 거울이 깨져 박살난다 함이니 남녀가 이별하는 것이요, ‘파탄(破綻)’ 또한 일이 잘 이뤄지지 못하고 그릇됨을 이름이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가고 만다는 얘기다.

친한 것은 친한 것으로, 친한 만큼 더욱 견고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마땅히 둘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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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벅에도 그믓 긋나. 범벅에도 그믓 긋듯 그렇게 분명히 할 때, 실천이 따르게 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그게 결국 처신을 반듯하게 하는 길이다. 사진은 감자범벅.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필자가 쓴 졸작 〈아름다운 거리(距離)〉란 수필의 일부를 여기 옮겨 놓는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자연히 되지 않는 것이다. 만들어야 한다.'

친구 사이에 싹트는 우정도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깊고 오래 간다. 지나친 접근은 갈등을 낳아 외려 사이를 멀게 할 수 있다. 바라볼 수 있는 여백,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낼 때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친할수록 선을 그으라 했다.

연인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짧은 시간에 활활 달아오르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진정이 의심스러운 경우다. 양은냄비처럼 쉬이 달궈지면 쉽게 식어 버린다. 선을 넘는다는 얘기는 거리를 좁히려는 데 집착한 나머지 저지르는 실수다. 아낌없이 준다는 것은 마음이고 정신이지 쾌락을 위한 육체의 제공은 아니다. 아낌없이는 상대를 자신처럼 아낌을 전제한 말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거리를 두는가. 거리를 둔다면 일촌(一寸)의 간격쯤일 것이다. 그래도 거리는 있어야 한다. 네 것 내 것이라는 소유를 떠나 자신의 삶이라는 구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길을 가는 데 공간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크고 작은 운신 폭이 곧 거리다.

‘범벅에도 그믓 긋나’
‘애비 아덜 간에도 범벅에 그믓 긋나’

어떻게 이런 비유를 했을까. 종이에나 땅에 붓으로 또는 막대기로 금을 긋는다 하지 않고, 그것도 먹는 음식인 범벅에다 제 몫을 표시한다고 했다.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도 금을 그어야 한다 함이 아닌가. 그러면서 은연중 ‘범벅’이라는 식생활 속의 ‘소유’와 연관시켰다.
  
인간관계에서 절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하지만 막연한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범벅에도 그믓 긋듯’ 그렇게 분명히 할 때, 실천이 따르게 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그게 결국 처신을 반듯하게 하는 길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 김길웅 시인. ⓒ제주의소리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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