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물’은 다른 지역 그것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뿌리내려 숨 쉬는 모든 생명이 한라산과 곶자왈을 거쳐 흘러나오는 물에 의존한다. 그러나 각종 난개발, 환경파괴로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 제주 물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는 요즘, 남아있거나 사라진 439개 용출수를 5년 간 찾아다니며 정리한 기록이 있다. 고병련 제주국제대 토목공학과 교수의 저서 《섬의 산물》이다. 여기서 '산물'은 샘, 즉 용천수를 말한다. <제주의소리>가 매주 두 차례 《섬의 산물》에 실린 제주 용출수의 기원과 현황, 의미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제주섬의 산물] (73) 대평리 비진기정 산물

안덕면 대평리는 예전에는 ‘큰들’ 또는 ‘난들(난드르)’라고 했는데, 바닷가에서 멀리 뻗어나간 넓은 들판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대평리(大坪里)는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마을을 감싸는 군산 정산에 쌍선망월형(雙仙望月形)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으며, 여기에 묘를 쓰면 가뭄이나 흉년이 들기 때문에 묘를 써서는 안 된다는 금장지(禁葬地)가 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바다에는 마라도와 가파도, 형제섬이 떠있고, 해안 서측 자락에는 송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을 뒤로는 주상절리로 형성된 ‘박수기정(병풍기정)’이라는 절벽과 사자가 누운 형상이라는 군산이 감싸주고 있다. ‘기정’은 벼랑이나 절벽을 일컫는 제주어다. 

박수기정은 대평리 서쪽 바닷가로 지경 상 감산리에 속해 있지만 실제 이 일대의 바닷가를 이용하고 관리하는 생활환경은 대평리라 할 수 있다. 절벽 중턱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박수기정을 대왓기정이라고도 하는데, 이 기정에는 두세 군데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 비진기정이라고도 한다. 비진기정은 바닷가 단애에서 물이 떨어져 비가 오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기정은 용왕의 아들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절벽으로 대평리 포구에서 찾아 갈 수 있는데,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어 길은 험하나 바다와 어우러져 경치가 아름다운 숨은 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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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기정 단애.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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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는 것 같은 비진기정.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박수기정은 주상절리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고 해서 병풍기정이라고 한다. 이 기정 아래 지상 1미터 쯤 되는 암벽에서 사철 끊이지 않는 맑은 물이 솟는데, 이 산물의 물 나오는 곳이 바가지처럼 되어 바가지로 떠 마신다는 뜻으로 ‘박수(박소)물’이라 한다. 이 산물은 물을 맞으면 피부병 등에 좋다고 알려진 ‘백중물맞이’하는 유명한 약수터다. 물 맞으러 오는 여인들이 즐겨 찾았던 곳으로 지금은 기정 탐방객이나 낚시꾼의 물로 활용된다. 

물이 나오는 곳에 누가 갖다 놓았는지 쇠파이프 하나가 꽂혀 있고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산물은 쇠파이프를 통해 바다로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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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옛 사람들은 햇빛 받는 물을 숫물(남자물), 응달에 있는 물은 암물(여자물)로 구분지었다. 그 중에서 음지에 있는 물은 명수라 하여 약수로 먹었다. 그 이유는 그늘에 있는 음지의 물이 햇빛 받은 양지의 물보다 물 온도가 낮고 무거워서 물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물 중에서도 바위의 틈에서 솟구치는 물을 가장 으뜸으로 여겼다. 

우연일까, 비진기정의 박수물은 바위틈 물 내리는 형상이 여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음의 기운이 강한 여자물로서 최상의 약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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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 틈에서 솟는 박수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제주 섬에는 어느 마을이나 당신(堂神)을 모시는 당이 있다. 마을의 당신은 보통 '조상'이라 한다. 당신은 마을이 설촌되면서 부터 모시게 된 지연적 조상이면서 동시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 땅을 일구고 농경생활을 하게 된 때부터 마을의 수령으로 좌정한 혈연적 조상이다. 

때문에 이러한 조상을 수호신으로 모신 신앙공동체는 혈연, 지연의 결속을 강화하면서 신앙을 통해 공동체 일탈을 예방하는 역할을 해 왔다. 이것이 제주마을의 ‘당 신앙’이라 한다. 그리고 물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뿐만 아니라 무속신앙에서는 사람과 신과의 매개체적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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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망당.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대평리에도 마을 부녀자들이 가족과 이웃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당팟할망당’, 다른 말로 ‘난드르일렛당’이라는 매우 영험한 신당이 당캐에 자리 잡고 있다. 당캐는 당이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이 할망당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본향신, 생업수호신, 육아의 질병수호신의 성격을 두루 담고 있는 독특한 신당이다. 영천수(靈泉水)로 통하는 ‘할망물’을 갖고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을의 건강과 공동체 문화가 오늘까지 이어지게 하는 원천으로 할망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토지주가 땅을 정리하면서 할망물의 원형이 망실되고 물도 끊겨 버렸다. 그나마 완전히 없애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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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실된 할망물. 제공=고병련. ⓒ제주의소리

# 고병련(高柄鍊)

제주시에서 태어나 제주제일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대학원 토목공학과에서 수자원환경공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공학부 토목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제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공동대표, 사단법인 동려 이사장, 제주도교육위원회 위원(부의장)을 역임했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고연(노인요양시설 연화원) 이사장을 맡고있다. 또한 환경부 중앙환경보전위원과 행정자치부 재해분석조사위원, 제주도 도시계획심의, 통합영향평가심의, 교통영향평가심의, 건축심의, 지하수심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건설기술심의와 사전재해심의 위원이다.

제주 섬의 생명수인 물을 보전하고 지키기 위해 비영리시민단체인 ‘제주생명의물지키기운동본부’ 결성과 함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제주 용천수 보호를 위한 연구와 조사 뿐만 아니라, 시민 교육을 통해 지킴이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섬의 생명수, 제주산물> 등의 저서와  <해수침입으로 인한 해안지하수의 염분화 특성> 등 100여편의 학술연구물(논문, 학술발표, 보고서)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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