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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제주시 아라동 첨단과학단지에서 만난 고광민 위원이 풀이 무성한 공터에서 "예전 같으면 소 덕분에 이런 풀이 남아나질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고광민에게 듣는 추석 제주생활사] 소 먹이 '촐' 시작으로 본격적인 가을 수확 노동

이제 추석 명절하면 송편, 귀경길보다 해외여행 소식을 더 자주 접할 만큼, 전통적인 명절 개념은 점차 옅어지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추석에 대해 ‘봄에서 여름 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들이 익어 수확을 거둘 계절이 됐고, 1년 중 가장 큰 만월 날을 맞이했으니 즐겁고 마음이 풍족하다’고 설명한다. 특히 ‘추석 때면 농가도 잠시 한가하고 인심도 풍부한 때’라면서 예나 지금이나 이어오는 여유 있는 분위기의 기원을 전한다.

제주는 한때 ‘탐라’라는 이름을 보유할 만큼 독자적인 문화를 간직해왔다. 제주 역시 다른 지역처럼 비슷한 추석 명절을 보냈을까? 평범한 섬 민초들의 생생한 삶을 다각적으로 조명해 큰 화제를 모은 책 《제주 생활사》(2016)의 저자 고광민 연구위원(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의 생각은 “아니올시다”이다.

고 위원은 오랜 과거부터 산업화 이전까지 제주의 추석이 반도와 제법 달랐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차이는 다름 아닌 환경, 노동의 차이다. (인터뷰는 9월17일 이뤄졌다.)

“한반도에서 추석은 일종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하다. 햅쌀로 명절을 보낸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제주도의 추석은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제주는 추석 전에 수확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논농사가 전체 0.5% 수준을 넘지 않았던 제주는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는 다른 지역과 달랐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의 존재는 추석뿐만 아니라 가을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핵심이다.

“육지(제주 외 다른 국내 지역)는 소여물을 작두로 썰어 솥에 끓여 내준다. 화식(火食)이다. 그런데 제주도는 마른 풀을 그냥 주는 생식이다. 제주에서는 소 한 마리가 겨울 한 철 동안 2000평(약 6611.5㎡) 풀을 먹고, 다른 계절에 쓰는 방목지는 2500평(약 8264.4㎡)이나 된다. 농사력은 양력, 절기로 구분하는데 추분(9월 23일경)이 추석과 딱 맞다. 상당수 제주 사람들은 추석부터 촐(목초) 베는 데 여념이 없었다. 부지런한 사람은 추석 상을 차리고 나서 곧바로 촐 베러 갔다.”

제주 산전초목에 소 먹는 촐만 나진 않는다. 사람 먹을 것도 다양하게 나고 자라지만, 예로부터 제주인들에게 가을 수확의 1순위는 촐이었다. 소 먹을 것을 가장 먼저 챙기고 나서 콩, 메밀, 조 등 식량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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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촐 베는 모습. 출처=제주학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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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제주 초가 모습. 추석 즈음 베어온 촐 더미가 집 인근에 쌓여있다. 출처=제주학아카이브.

농부가 열심히 벤 촐은 차곡차곡 쌓아 가리(제주어로 눌)를 만든다. 마침 불어오는 서북풍 덕분에 촐은 2~3일이면 물기가 바싹 말라 겨우내 먹일 건초가 된다.

제주사람들이 만사 제치고 촐부터 챙긴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농사일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라서다. 고 위원의 저서 《제주생활사》를 보면 “제주도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하더라도 남한과 북한 합친 전국 1% 정도의 땅에서 전국 두수의 30% 소를 키웠다. 그리고 집집마다 한 마리의 돼지를 길렀다”고 설명한다. <위지동이전>에서 제주도 사람들을 두고 “소와 돼지 키우기를 좋아했던 민족”이라고 언급한 내용도 추가된다.

고 위원은 “제주도와 제주도의 부속도서 사람들은 쇠똥을 거름이나 연료로 이용했다”며 “마라도에서는 쇠똥을 주우려고 새벽 1~2시에 일어나는 아낙네도 있었다”고 말한다. 밭을 가는 용도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소는 필수불가결이었다.

고 위원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촐은 제주에서 사실상의 화폐였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남자는 15세부터 주민세를 냈다. 한 사람이 촐 한 바리를 내는데, 한 바리는 소가 짊어지는 한 짐이다. 난 당시 공무원 봉급이 촐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무를 수행하는데 촐 벨 시간이 없지 않겠나. 제주목사 이원조가 남긴 <탐라지>를 보면 훈장 선생들은 학부모들이 모아 온 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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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소를 이용해 밭 가는 모습. 출처=제주학아카이브.

소 먹을 촐이 정리되면 잡곡을 수확한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순서는 볏과식물 ‘새’다. 제주에서 지붕용으로 사용한 새까지 거둬야 제주의 가을은 마무리된다.

“동짓달(12월) 초하루 날이 되면 제주도 전체가 오픈(Open)한다. 한꺼번에 새를 수확한다는 의미다. 그 시기가 돼야 새가 익기 때문에 허채(許採) 했다. 동짓달 초하루 날 새를 거둔다는 건 제주 안에서의 오랜 관습법이었다. 만약 그 전에 수확하면 도둑놈 취급을 받았다. 남의 것 뿐만 아니라 자기 새에 손대도 물론이다. 그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촐 베기로 시작한 제주 가을은 새로 끝난다.”

추석을 포함한 제주의 가을 풍경은 이처럼 생존과 밀접하다. 그렇다면 해녀들이 활동한 바닷가는 어떨까. 뭍과는 정반대 패턴이라는 게 고 위원의 절명이다. 

“봄이 되면 파릇파릇하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그런데 제주 바다에는 그런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바다는 땅과 절기가 반대다. 촐 베는 가을이면 바다에서는 미역 같은 해조류가 나오기 시작한다. 땅으로 치면 봄이다. 겨울이면 성장하고 봄이 되면 수확한다. 그래서 제주에는 ‘촐 그루에 미역난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쿠로시오 해류의 영향으로 제주 서쪽이 동쪽보다 두 달 느리다.”

결국 평범한 대다수의 제주 사람들에게 추석은 생존을 위해 땀 흘리는 바쁜 나날이었던 셈이다. 고 위원은 “가을걷이가 시작되는 추석은 제주인들의 삶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고 강조했다.

추석에 대한 이야기를 끝낸 고 위원은 꼭 하나 남기고 싶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기자 양반, 1968년 9월 21일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제주도 사람이면 이 날을 꼭 기억해야 한다. 제주가 천지개벽한 날이다. 바로 제주도 경운기 기술교육을 첫 번째로 수료한 날이다. 이 날을 기점으로 소가 할 일을 경운기가 하게 됐다. 경운기로 촐 밭을 갈아엎고 감귤을 심었고, 결국에는 그 땅들을 골프장에까지 팔아먹었다. 1968년 9월 21일, 그날은 제주도의 원초적인 역사가 바뀌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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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제주시 아라동 첨단과학단지에서 만난 고광민 위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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