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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레타 <이중섭>의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리뷰] 서귀포시 창작 오페레타 <이중섭-비바람을 이긴 기록>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다.’
- 이중섭(1916~1956)
2016년, 2017년에 이어 서귀포시 창작 오페레타 <이중섭-비바람을 이긴 기록>(이중섭)이 세 번째를 맞는다. 매해 변화를 거듭해온 공연이 올핸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생전 이중섭이 남긴 이 말은 그의 순수했던 예술혼을 압축해서 잘 나타내는 명언이다. 

각색까지 도맡으며 상당한 의욕을 보인 새 연출자 김숙영 씨는 왜 이런 부제를 덧붙였을까? 2018년 <이중섭>은 이중섭이 삶 속에서 보여준 ‘예술은 사랑’이라는 가치를 넘어, 시대 속 예술가의 고뇌를 보여주려 했다.

# 모든 것이 달라진 오페레타 이중섭

사실 9월 6일 첫 공연을 시작하기 전부터 ‘올해 <이중섭>은 다르다’는 평이 여러 곳에서 들려왔다. 새 연출가의 활약과 함께 출연진이나 관계자들 역시 한 목소리로 ‘기대할 만하다’는 식으로 군불을 뗐다. 이례적으로 공연 당일 서귀포시가 리허설에 대한 리뷰 식의 보도자료를 배포할 만큼 올해 공연에 대한 기대는 어느 때보다 커보였다. 기사를 위해 주변 반응에 최대한 신경 쓰지 않고 좌석에 앉은 기자는, 2시간이 흐른 뒤에 기대가 허풍이 아님을 확인했다.

올해 <이중섭>은 각본, 음악, 무대, 영상, 소품 등 거의 모든 구성에 변화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본은 이중섭·마사코(이남덕)의 결혼식과 이중섭의 일본 불법체류 생활이 통째로 빠졌다. 이전 공연에서 결혼식은 클라이막스로 사용될 만큼 제법 비중이 있었지만 주민들의 대화로 아주 짧게 처리됐다. 이중섭의 불법체류는 회상으로 교체됐다.

사라진 분량은 새로운 내용으로 채웠다. 구상, 김광림, 최태응, 한묵, 박고석 등 동시대 활약한 예술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중섭을 조명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작품의 큰 물줄기가 바뀐 셈이다.

이중섭과 마사코의 대학 시절을 보여준 1막 1장도 크게 수정됐다. 중반부에 나오던 마사코의 어머니는 처음에 등장한다. ‘여신’으로 추앙받으며 텐션(tension)이 높았던 마사코의 어머니는 불나방 같은 마사코의 사랑을 염려하면서 결국 딸의 선택을 믿고 지지해주는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이전 작품에서 서귀포의 이중섭 생활은 아이들의 게 율동에 세연교 사진까지 등장시키며 한껏 들뜬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비교적 차분해졌다. 4.3으로 가족을 잃은 해녀들에게 영정 그림을 그려주며 생활했던 실제 이야기가 삽입돼 사실성을 높였다. 

지난해는 동료 예술가로 구상, 한묵, 차근호, 김환기 네 명이 등장했는데, 올해는 구상, 김광림, 최태응, 한묵, 박고석까지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동료들의 중창 파트가 새롭게 추가될 정도로 실질적인 비중이 커졌다. 주로 배우들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역할로 쓰이던 무용수는 단역으로 등장했다. 덕분에 극과 유리된 느낌에서 다소 탈피할 수 있었다.

이야기 만큼이나 기술적인 변화도 상당하다. 엄연히 따지면 변화보다 진보(進步)가 옳은 표현이겠다.

극 무대는 일본 동경의 밤과 낮, 원산, 서귀포, 정치용의 집, 미도파 전시장, 정신병동 환자실까지 은은한 색감을 유지하면서 한층 발전된 매끄러운 애니메이션 영상이 덧입혀졌다. 좌우 비율이 동일하지 않은 비대칭 무대가 수시로 등장했는데, 이질적인 공간감으로 관객을 주목하게 만든 기억에 남는 시도다.

작품 속 손꼽는 영상 기술은 화가로서 이중섭을 보여주는 3막이다. 3막 1장 시작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이중섭은 허공에 붓질을 하기 시작한다. 붓질과 열정 가득한 노래가 끝나자 무대 맨 앞 반투명 내림막 위로 커다란 이중섭의 소 그림 영상이 비추며 전율을 선사했다.

3막 2장은 이중섭의 작품 <서귀포의 환상>(1951)과 <흰소>(1954)를 동료들이 소개하는 장면이 추가됐다. 무대 상단에 위치한 패널을 평소보다 내리게 한 뒤, 소개 작품마다 패널 위에 애니메이션 작품 영상을 띄우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극 전반에 걸쳐 이중섭 작품 이미지를 무대 화면에 띄운 지난 공연들과 달리, 올해는 극히 일부 중요한 순간에만 비추면서 집중 효과를 노렸다.

가로등, 남자 기모노, 일본풍 붉은 색 교각, 정낭, 돌담 등 적절한 소품도 제 역할을 다했다. 특히 섬세한 소품 활용이 인상적이었다. 1막 1장의 가로등이 대표적이다. 날이 어두워지고 마사코와 어머니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꺼져있던 가로등에 불이 켜진다. 마사코가 어머니에게 결혼 승낙을 받고 기쁨의 노래를 시작하자 불빛이 더 커진다. 붓, 팔레트, 물감, 스케치북 등 이중섭이 화가임을 보여주는 도구는 초연부터 기다려왔는데 3년 만에 등장해 무엇보다 반갑다. 

제작진은 배우 머리에 마이크를 달아 깊은 아쉬움을 남긴 지난해와 달리, 무대 마이크를 늘리는 현명한 방식을 택했다. 현악기를 도입한 서귀포관악단의 연주는 극 진행에 한층 더 녹아들었다. 서귀포합창단은 지난해보다 더 큰 역할을 부여받았고 훌륭히 소화했다. 단역이 5명에 불과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10명으로 늘어났다. 서귀포합창단은 단순 전체 합창만이 아닌 각자 역할을 부여받아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줬다.

<이중섭>을 처음 관람하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공연으로 느끼겠지만, 지난 3년을 알고 본다면 ‘놀랍다’는 인상을 충분히 가질 만하다. 그 만큼 이번 <이중섭>은 완성도에 신경을 썼다.

# 빨갱이 용어와 서귀포 장면

물론 아쉬운 장면이 없진 않았지만 연출 상의 의도로 해석될 부분이며, 그 외에는 작은 실수가 대부분이다. 

극 말미 이중섭이 빨갱이로 몰리면서 전시를 망치는 장면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이중섭에게 심리적·물적 좌절을 안겨주고, 정신병동에 입원해 최후를 맞이하는 이야기가 곧바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미도파 전시장을 들이닥친 경찰관은 이중섭에게 빨갱이가 아니냐고 추궁한다. 그 이유로 “사상이 의심스럽다”, “자신의 작품을 졸작이라고 순순히 받아들인다”, “아이들 웃음 위에 남자와 여자를 뒤섞어 놨다”고 꼽는다.

그렇게 전시를 망친 이중섭은 다음 장에서 정신병동에 입원한다. 손으로 밥을 퍼먹고 갑자기 그릇을 내동댕이치는가 하면, 동료들의 걱정에도 넋이 나간 듯 웃는, 그야말로 정신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로 그려진다. (실제 이중섭은 생애 말기 거식증에 정신 분열을 겪었다.) 

경찰관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주인공이 처절하게 몰락하는 원인인 동시에,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용어(빨갱이)가 대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경찰관이 제시하는 이중섭이 빨갱이인 이유로는 결과에 대한 개연성이 다소 약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왜 해방 직후에 남으로 내려오지 않았나’, ‘작품 속에 왜 굴뚝, 붉은 소를 그렸냐’ 등의 실제 이중섭이 받았다고 알려진 오해의 내용을 대사에 녹여내면 개연성에 보다 힘이 실리지 않을까 싶다. 

서귀포 생활 장면에서 마사코의 감정 변화 역시 보다 세밀하게 접근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사코는 “제2의 고향”, “낙원”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서귀포를 노래하지만 표정은 내내 어둡다. 그러다 일본에 계신 아버지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을 한다. 지금은 기쁨을 노래할 때도 내내 근심 가득히 연기를 하지만, 노래 내용대로 서귀포 생활은 기쁘게 표현하면서 중간 정도에 슬픔으로 전환하는 건 어떨까 생각해본다. ‘무슨 일 있냐’는 식의 이중섭과의 짧은 대화라도 있다면 다가올 우환을 암시하면서 감정 변화를 충분히 예고할 수 있어 진행이 더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감히 더해본다. 연출은 연출자 고유의 영역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서귀포에서 구두를 신고 있던 이중섭과 두 자녀, 세련된 옷을 입은 마사코는 한 눈에 봐도 어색하다. 실제 이중섭 가족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입도해 서귀포로 올 때까지 3일 동안 고구마를 얻어먹고 소 외양간에서 밤을 보내고 눈길 속을 헤매는 그야말로 ‘생고생’을 경험했다. 서귀포를 홍보해야 하는 부분인 점을 감안해도, 어느 정도 현실성을 고려한 복장, 소품이 바람직해 보인다. 

3막 1장에서 이중섭이 동료들에게 보여주는 그림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종이로 준비됐다. 이어진 2장 전시장에서는 더 큰 그림이 액자로 등장한다. 연기에 무리가 없다면 관객이 더 잘 보이도록, 1장부터 액자로 사용하거나 혹은 종이 크기를 키우는 것이 어떨까 싶다.

노래를 압도하는 관악 연주의 문제는 앞선 공연보다 제법 개선됐다. 그러나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3막 1장은 힘찬 느낌의 5인조 남성 중창인데, 관악 연주도 함께 느낌이 상승하면서 같은 문제를 노출했다. 1막 1장에서 마사코, 어머니가 함께 하는 노래는 새로 만들어졌다. 원곡들 선율이 워낙 귀에 쏙쏙 들어오기 때문인지 새 곡은 조금 늘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밖에 일부 배우가 노래 시작 타이밍을 놓치거나 무대 좌우측 대사 알림 화면 속 맞춤법, 문장이 틀린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 변화 속에서 작품은 성장한다

결과적으로 올해 <이중섭>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화가 이중섭을 시대 속의 인물로 그리려 노력했다. 각색 과정을 거치면서 이중섭이나 마사코를 주로 향하던 시선을 분산시킨 연출 의도에 대한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무대 맨 위에 올라선 이중섭에게 가족이 큰 절을 올린 2016년 초연, 흰 꽃을 뿌리며 이별을 표현한 지난해, 그리고 올해 피날레는 어두운 정신병동 안에 홀로 남은 이중섭이 고독히 빛 속으로 들어간다. 곧이어 이중섭 없는 무대 위에서 그를 사랑했던 동료, 가족이 함께 노래하고 작품 이미지를 화면에 나열하며 끝이 난다.

초연부터 3회째인 올해까지 <이중섭>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예술은 사랑’이다. 주인공이 일생 동안 바라던 것은 위대한 화가 반열에 오르는 것도, 많은 부를 쌓는 것도 아닌 아내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와의 따뜻한 사랑이다.

이번 공연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예술을 편향된 잣대로 판단했던 시대 속에서, 끝내 꽃 피우지 못한 예술가의 안타까운 삶을 한층 더 부각시켰다. 너무나 순수했기에 그것이 도리어 본인에게 독이 돼 돌아온 순간도 있었지만, 진심을 알아줬던 동료 예술가들을 내세워 고귀한 이중섭의 예술 정신을 들려준다. 

2018년 <이중섭>은 무산된 제주아트센터 공연이 다시 한 번 아쉬울 만큼 기억될 작품이다. 변화의 핵심은 단연 김숙영 연출가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춘천시립예술단, 창원시립예술단에서 창작 뮤지컬을 쓰고 연출하면서 익힌 대(對) 행정 노하우에, 이중섭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작품을 탄탄하게 만드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변화의 완성은 연출가만의 몫은 아니다. 가슴 깊숙한 감정선을 자극하는 작곡가 현석주의 음악, 친근한 가사로 관객에게 다가서는 이영애의 대본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연기를 소화해야 하는 이중섭 역 배우와 주·조연들이 있다. 서귀포합창단과 관악단의 비중은 작품이 살아있는 한 계속 중요해질 것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공연 예술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중섭>은 서귀포시의 지원, 서귀포예술단의 헌신, 시민들의 사랑을 바탕으로 어느새 그 위치를 노릴 만큼 경쟁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마침 제주시 창작 뮤지컬 <만덕>의 두 번째 공연이 10월로 앞둔 상태다. <이중섭>은 한 지역에서 공연 예술을 무대에 제대로 올리려면 그것을 감당하기 위한 인력 풀(Pool)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올해처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애정, 그것이 계속 이어진다면 <이중섭>이 제주 대표 공연으로 우뚝 서는 날은 머지않을 것이다.

남은 <이중섭> 공연은 7일 오후 7시 30분, 8일 오후 3시와 7시 30분이다. 장소는 서귀포예술의전당 대극장이며, 관람료는 S석 2만원, A석 1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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