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 숨, 쉼] 태풍 솔릭이 내게 남겨준 유용한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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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 쓰는 내 친구 김희정이 몽생이 대화방에 올려준 사진. 조천읍 와산리에 사는 희정이는 23일 태풍 때문에 제주 시내에 있는 가게에 못 나가고 있다가 무지개를 건졌다며 사진을 올려줬다. 제공=홍경희. ⓒ제주의소리

제19호 태풍 솔릭이 제주를 지나갈 것이라는 소식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기상청은 진즉부터 솔릭의 경로, 위력 등을 날마다 새소식으로 전했고 행정 당국은 대비 철저를 당부해 모를 수 가 없었다. 그런데 안다는 것과 실천은 별개의 일이다. 그 간극에서 많은 일이 일어난다.

태풍이 온다는 22일 나는 대전과 서울에서 한 달 전에 잡힌 약속이 있었다. 나도 잠깐 고민은 했다. 태풍이 온다는데 괜찮을까. 생각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나만의 태풍 경로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태풍은 오후에 올 거야. 그러면 올라가는 것은 문제없을 거고 내려오는 것만 잘 조절하면 되겠네. 생각에서 시작한 나만의 태풍경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확신으로 변해 제주-청주 항공 , 청주-서울 기차, 서울-제주 항공편을 예매했다. (치밀하게!!!)

나는 자신 있었는데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태풍이 온다는데 꼭 가야겠느냐, 일정을 미뤄라. 

무시하고 나는 22일 아침 청주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청주도 대전도 햇볕 쨍쨍, 태풍은 멀어보였다. 대전 일정을 잘 마무리하고 서울로 가기위해 대전역으로 갔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기차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느긋하게 역사에 있는 라면집을 찾았다. 라면 한 그릇 시켜놓고 한 숨 돌리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 제주행 비행기가 다 결항이니 빨리 오라고. 설마 그럴까,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하면서 항공편을 검색했는데, 이런 다 결항이었다.

주문한 라면이 나왔는데 한 젓가락도 못 먹고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지금도 그 탱글탱글한 면발, 그 면발 가운데 태양처럼 솟아오른 계란 노른자를 잊을 수 없다.)

목표는 오직 하나, 오늘 제주에 가야한다. 아둔한 머리로 여러 가지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오후 1시. 서울보다 청주에서 타는 게 낫다. 청주-제주 오후 2시 15분 출발 비행기가 유일한 답. 그 후는 다 결항. 여기서 택시로 공항까지 보통 한 시간 잡지만 차가 밀리지 않는 시간이니 좀 빨리 갈 수 있겠지. 택시 안에서 비행기 예약을 시도했다. 앗... 또 상황 발생. 나 같은 사람이 많아서인지 분명 자리가 있었는데 결제하는 사이 사라져버린다. 두 번이나 사라지니 다시 불안해져서 방향을 바꾼다. 

“아저씨, 대전역으로 다시 가주세요. 서울로 갑니다.”

허탈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검색했다. 아...... 다행이다. 자리 잡았다. 다시 택시는 청주로. 혼자서 무슨 활극 드라마 한 편 찍는 기분이었다.

나름 스릴 있었던 드라마는 오후 2시 15분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가 항공기 연결 문제로 3시에 출발하면서 느긋하게 마무리 되었다. 그날 나는 무사히 제주로 돌아왔고 제주를 오가는 비행기는 24일 오후가 되어서야 정상 운항을 시작했다. 비행기가 날기 시작하던 즈음 제주도 곳곳엔 무지개가 떠올랐다. 카카오톡 밴드등 각종 온라인 모임에 이 동네 저 동네 무지개 사진이 앞 다투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곱 빛깔 아름다운 무지개는 길었던 폭염의 나날에 이어 천지를 흔들었던 태풍의 나날까지 잘 버텨낸 것에 대한 선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사는 게 그렇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더위도 때가 되면 물러나고 느림보 태풍도 결국 제 갈 길을 간다. 그러다가 문득 선선한 바람이 부는 하늘 위로 찬란한 무지개가 떠오른다. 비가 와야 무지개가 뜬다는 것이다. 찬란한 무지개는 눅눅한 비의 날에 대한 결과다. 마찬가지로 슬픔이 없는 기쁨만으로 채워진 세상, 불행이 없는 행복만으로 채워진 세상은 없다.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은 연결되어 있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러니 매일 매일 순간을 성실하게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좋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또 삶에 도움이 되는 아주 유용한 깨달음도 덤으로 얻었다.

가끔은 남편 말도 귀담아 듣자.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남편이 볼 수도 있다.)
남편의 합리적인 조언을 내가 듣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아들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주옥같은 내 고견을 듣지 않았구나. (좀 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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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태풍 솔릭은 이런 깨달음을 내게 남겨주었고 우리 집 진돗개 바우에게는 짧은 여행 선물을 주었다. 강풍에 바우가 살던 철망울타리 집 한 쪽 기둥이 뽑히면서 기우뚱 가라앉은 철망 사이 틈으로 유유히 빠져나간 것을 안 것은 점심 즈음이었다. 기둥 뽑힌 것도 기막혔지만 사라진 바우가 더 걱정이었다. 한 나절 내내 가슴 졸이며 기다렸는데 밥 먹을 때가 되니 알아서 돌아왔다. 돌아온 기념으로 그날은 사료와 뼈다귀를 주었다.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행이다. 

이번 태풍 피해보신 분들도 어서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 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https://blog.naver.com/jejubarams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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