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01) 임경석,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역사비평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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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석,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역사비평사, 2008. 출처=알라딘 홈페이지.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 직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몇몇은 학생이거나 교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 경작지, 신문사의 일에 전념하지 않았다. 다른 일에 마음을 두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가운데
이 책의 주인공들은 잊힌 사람들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지만, 좌파 운동가였기에 분단의 세월 속에서 잊혀 갔다. 윤자영, 박헌영, 김단야, 강달영, 김철수, 고광수, 남도부, 안병렬!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명에 저세상으로 갔다. 더러는 고문 탓에 죽고, 더러는 형장의 이슬이 됐다. 어떤 이는 제정신을 온전히 유지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고, 어떤 이는 평생 맞서 싸웠던 적의 첩자라는 누명을 쓴 채 동지에 손에 죽음을 맞았다. 저자는 그들의 영혼이 있다면 필시 저 세상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지금도 중음신(中陰身)이 되어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대학에서 ‘인문학명저산책’이라는 과목의 강의를 몇 년간 했었다. 인문학 서적 중 몇 권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인문학 공부를 하는 강의였다. 그 강의에서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의 책 두 권을 고르자니 고민이었다. 나는 현대사를 공부하는 입장이라 식민지시기를 전공하는 선배에게 추천을 요청했고, 그 책은 김산의 《아리랑》과 이 책이었다.     

아리랑은 내 청춘의 책이었고, 이 책은 나이 들어 눈물범벅이 되어서 읽었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어느 순간, 혹은 관련 자료를 볼 때 마다 눈물은 나의 몫이었다. 역사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때마다 눈가가 붉어짐은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이 책 또한 그렇게 읽었고 ‘BOOK世通, 제주 읽기’를 쓴다고 했을 때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물론 이는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는 처지로서 나의 소회일 뿐이다.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의 불꽃은 192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 좌파 항일투쟁으로 타올랐다. 1920년대 우익 민족지도자들의 변절과 민족개량주의라는 회의론 속에서 민족주의 계열이 힘이 약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사상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명 ‘모던보이’는 마르크스 보이였다. 1980년대 대학생이라면 평범한 젊은이들도 읽었을 ‘Marx’는 식민지 시기 공부깨나 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현상이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민족주의자 박은식도 1920년 《독립운동지혈사》에서 “러시아 공산당은 선두에 적기를 내걸고 전제정치를 타도하여 민중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고 제 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했다. 과거에 극단적인 침략주의자가 극단적인 공화주의자로 바뀌었다. 이것은 세계개조의 최초의 신호탄이 되었다”라고 하며 러시아혁명에 대한 벅찬 감격과 기대를 나타냈다. 

러시아혁명과 1차 세계대전 직후 고양된 국제혁명운동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가 국내에 수용되었다. 3.1운동 뒤에 민중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고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따른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깊어지면서 사회주의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초기 사회주의사상은 일본.시베리아.상하이를 거쳐 흘러들어와 책과 신문, 잡지에 널리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강연회를 통하여 민중 속에 전파되었다. 일제조차도 “그동안 독립운동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초조해진 민중에게 사회주의운동은 일종의 자극과 광명을 주었다”고 지적할 만큼 사회주의 영향은 컸다. 

1920년대 초 국내에 사회주의사상이 보급되자 지식인, 청년, 학생, 선진 노동자들은 대중단체와 여러 서클을 만들었다. 결국 1925년 4월 17일 서울 황금정(을지로)에 있는 아서원에서 김재봉, 김찬, 김약수, 조동호, 박헌영 등 19명이 참석해서 조선공산당 창립 대회가 비밀리에 열렸다. 창당 무렵 당원 수는 120여 명이었다. 당대회에서 “조선혁명은 민족해방, 반제국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모든 ‘애국 세력’과 적극 동맹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대회는 사회주의자들의 전위 조직의 탄생을 알림과 동시에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항일투쟁의 지도부임을 자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박헌영과 김단야! 식민지 시기 항일운동가였고, 조선인 사회주의자로써 엘리트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박헌영은 북한에서 미제의 간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김단야는 구소련에서 일제의 간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그들의 동지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1900년, 1901년에 태어난 두 사람은 모두 3.1운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박헌영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 반일 시위운동과 유인물살포에 참여했고 그 이후 직업 혁명가 인생을 시작했다. 김단야는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하는 도중 반일 학생 서클에 가담했다. 3.1운동 때는 <반도의 목탁>이라는 비합법 유인물을 정기적 발간하는 데에 참여했으며, 3월 24일 개령면 동부동 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김단야는 이 죄목으로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태형 90도를 선고받았다. 김단야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와 극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단 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4월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24년 1월 출옥하여 잠시 고향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활동의 출중함으로 인해 이들 세 사람은 트로이카, 또는 삼인당으로 불렸다. 그러나 김단야는 1925년 9월에 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되었고, 일제 경찰의 탄압을 피해 1929년 12월 서울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1930년 중반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근무했다. 

1937년에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김단야는 위기에 처한다. 김단야는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과장으로 근무했다. 김단야는 1937년 11월 5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결국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테러활동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의 지도자로서 제 1급 범죄자라는 판결 받고 사형 당한다.  
 
박헌영은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 같은 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 4월 국내침투를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했고,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 29일 서울 훈정동에서 아내 주세죽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이 이어졌고, 결국 심각한 정신이상 증세로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일본 재판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27년 11월 22일 병보석 출감이 허용됐다.  

박헌영과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었던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산송장이 되어 풀려난 친구를 보며 <박군의 얼굴>이란 시를 썼다.

박아, 박군아, ××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길 때까지.
- 심훈 <박군의 얼굴>
출옥한 박헌영 부부는 일경의 눈을 피해 1928년 8월 국경을 넘었다. 탈출 소식을 일간 신문들이 대서특필하고 경찰에 대한 징계가 이어졌다. 박헌영은 1929년 6월에는 모스크바로 옮겨 동방노력자대학에서 2년간 수학했으며, 1932년 1월 상해로 가서 활동하다 또 다시 1933년 7월 상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었다.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해방정국에서 박헌영은 좌익세력 최고의 지도자였다. “박헌영 선생 나오시라”는 벽보가 해방정국 곳곳에 나붙었다.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여 조선공산당 중앙기구를 구성, 당 책임비서가 되었다. 또한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연합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1946년 9월 남한을 탈출, 월북했고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이후 기다린 것은 남로당의 몰락과 피의 숙청이었다.  

김단야 죽음 14년 뒤에 박헌영도 북한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린 것이다. 1952년 8월 3일 12명의 남로당 출신 당 간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러 및 선전. 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의 명목으로 체포되었고 박헌영은 연금되었다. 1956년 7월 19일에 박헌영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때 동유럽과 소련을 순방하던 김일성이 급거 귀국하여 그날 저녁 박헌영의 처형을 지시했다고 한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제국주의를 적대시했던 터라 그들의 존재를 공공연하게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방 후에도 그랬다. 냉전과 분단체제의 음울한 분위기에서 그들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민주화가 진전된 뒤에는 금제의 벽이 얇아진 듯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걷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무서운 것은 세월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인지라 자료는 인멸되었고, 기억은 점차 색이 바라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망각 속의 존재다. 

일본제국주의를 온몸으로 저항했던 식민지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이 좌파이든 우파이든, 비록 사상이 다르더라도 항일투쟁이라는 그 뿌리는 같았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무기로 조선에서, 중국에서, 러시아에서 좌파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비록 그 순수한 열정이 스탈린주의로 귀속되고, 우상독재의 희생양으로 죽어갔어도 그 시작은 식민지라는 민족의 비극에서 비롯되었다. 

분단 70년이 되는 지금, 공존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지금, 그 세월을 감쌀 수 있는 우리 사회가 되었다고 본다. 그들의 한스러운 세월을 이념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으로 애잔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럴 여유는 충분히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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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정심 연구원.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 양정심
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원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학술위원장.
전 고려대, 대진대 연구교수.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며 제주4.3과 한국전쟁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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