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국제포럼] 양정심 대진대 연구교수 “통일정부 갈망하는 민중 의지 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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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정심 대진대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제주의소리
제주4.3은 오랜 일제강점기를 지나 ‘통일정부’를 갈망한 수많은 민중들의 의지를 대변한 ‘항쟁’이며, 그렇기에 한국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평가다.

양정심 대진대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4일 제주4.3평화재단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제주칼호텔에서 개최한 <한국 현대사 국제 포럼>에서 이 같이 밝혔다. 양 연구교수는 4.3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연구자이다.

그는 “1945년 해방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일제가 남겨 두고 간 유산을 청산하고 반봉건적 소작제도를 철폐해 민중에 뿌리내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투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양 연구교수는 “4.3 당시 토벌대와 유격대가 모두가 가해자였지만, 통계가 보여주듯 대부분의 학살은 토벌대에 의해 저질러졌다. 중요한 것은 희생자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라며 “이와 더불어 학살자가 급증한 시점이 유격대의 저항이 증가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양 측 간의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 이후였다는 점”이라고 4.3 학살의 문제를 지적했다.

더욱이 "학살에는 뚜렷한 원칙이 없었다. 학살의 집행자인 사병들과 경찰, 우익청년단은 규율이 결여된 채 공사의 구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행사했다. 여성에 대한 강간, 유희적인 살인, 무자비한 참수 같은 인도적인 행위에 반하는 범죄가 도처에서 일어났다"고 참담했던 순간을 짚었다.

양 연구교수는 “4.3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도민이 일방적으로 희생됐지만, 그 과정에는 제주도민이 항쟁의 주체로 존재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탄압에 저항하는 제주도민은 스스로 저항의 정당성을 확립해 나갔다”며 “4.3은 자치적인 투쟁과 단독선거 반대라는 정치적 투쟁이 결합된 도민의 적극적인 투쟁”이었다고 규정했다.

특히 “격렬한 항일투쟁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은 좌익정당은 인민위원회 조직과 3.1발포사건, 3.10총파업 등의 대중투쟁 속에서 제주도민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나갔다”면서 “다만 소개령 이후 토벌대의 강경 진압 작전으로 인해, 유격대는 산으로 올라온 피난민들을 돌볼 수 없는 역량이 거의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산이면 등산하면 혁명적이요 부등산은 비겁행위’, ‘한 달이면 해방이 온다’라는 식의 과장은 이미 (남로)당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함을 의미했다. 대중에 복무하는 당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4.3 진행 과정을 설명했다.

양 연구교수는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에게 강경 진압의 빌미를 제공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세력들의 잘못도 희석되지 않는다. 단독선거 반대와 공산주의 정부의 지지란 명백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4.3항쟁을 주도한 군사책임자 김달삼이 불리한 상황으로 가는 비상시기에 당책임자 강규찬까지 동반해서 북한으로 간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고 무장세력을 비판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와 5.10 단선저지투쟁, 이후 투쟁 속에서 보여줬던 하급당원들, 도민들의 헌신성은 구별해서 평가해야 한다”며 보편적인 도민 정서를 남로당 지도부와 구분했다.

양 연구교수는 “당시 제주도민은 두 쪽이 아닌 통일독립국가 수립을 원했고, 이 점에서 단선반대투쟁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제주도민은 제주도를 단독선거를 저지한 유일한 지역으로 만들어놓았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항쟁은 1년 여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다”면서 “제주도민이 항쟁을 통해 통일정부를 갈망하는 민중의 의지를 대변했다는 점에서 4.3항쟁은 한국현대사의 전개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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