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97)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박용준 역, 궁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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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박용준 역, 궁리, 2013. 출처=알라딘.

1. 정치인과 시인

지자체 선거가 끝났다. 다행스럽게도 결과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반도의 평화와 관련하여 훌륭한 외교적 성과를 거둔 대통령의 인기가 투표결과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사람들은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상상을 시작했다. 철도를 이용해 유럽까지 여행하는 꿈, 개마고원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꿈, 북한에 물건을 팔아 부자가 되는 꿈, 비무장지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꿈 등등. 이런 꿈들이 실현되기에는 넘어야 할 현실적인 장벽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냉전체제 속에서 북한의 군사도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식의 암울한 고민만 하던 시절에 비하면 상상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이 사실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최근의 정세변화를 통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점이 있다면, 어떤 그림이든 배경이 바뀌면 새롭게 보인다는 점이다. 북한이 전쟁에 미친 국가가 아니라는 점, 미국이 무력을 통해서만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하지 않는다는 점,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때문에 한국이 외교적으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은 한낱 핑계였다는 점 등이 확인되면서 세상은 이전과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그림은 국내의 정세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지역감정이 극복될 수 없으리라는 것, 빨갱이 컴플렉스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 군사독재에 대한 추억이 판세를 결정할 것이라는 것 등과 같은 고질적인 생각은 이번 선거를 통해서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있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런 변화가 재벌의 독식과 전횡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고,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엄격히 처벌되는 공정한 나라에 대한 공동의 상상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한 새로운 그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새로운 그림이 그것보다 더 큰 배경 그림을 바탕으로 해서만 우리 눈에 드러나게 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배경 그림을 바꾸는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전에 없던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 될 것이고, 가능 세계에서의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터이므로 정치나 경제의 논리로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배경 그림을 바꾸는 데에는 소위 ‘문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동네에는 지난 선거에서 자신이 시인임을 일차적으로 내세웠던 지자체 후보가 있었다. 그가 의정활동을 하는 것과 시인이라는 사실이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 후보자는 자신이 쓴 시를 홍보에 사용했다. 시인이 정치인이 될 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정치인이 되는 것과 비교해서 어떤 점이 나은지 해명되지 않는 한, 그의 시는 선거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보자는 낙선했다. 

그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문학은 과연 공적인 유용성을 갖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 사람이 소설을 많이 읽고 시를 외우는 일을 함으로써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에는 크게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고전을 읽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라는 것은 모든 선생의 진부한 가르침이다. 그런데 문학적인 소양을 쌓는 것이 정치적인 능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소설을 많이 읽고 시를 많이 외우면 그 사회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게 되는 건가? 이런 물음들은 한 번 진지하게 대답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 소설을 읽어야 하는 정치적 이유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는 그런 물음에 대한 해명이다. 철학자로서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작품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누스바움의 태도는 리처드 로티와 유사한 점이 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플라톤은 호머의 시가 영웅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룸으로써 젊은이들의 정서를 감상적이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여 그것을 금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국가적인 차원의 정의는 감정이 배제된 이성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런 관점은 문학과 철학을 명확히 구분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문학에 대한 이성적 진리 탐구로서의 철학의 우위를 주장하는 데에로 이어진다. 

누스바움과 로티는 플라톤이 설정한 철학과 문학의 위계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전선을 형성한다. 그러나 로티는 이성과 감성의 구분, 철학과 문학의 구분 자체를 허물어뜨림으로써 철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고자 하는데 반해, 누스바움은 문학작품이 그 형식과 내용을 통해 고유하게 포함하고 있는 일종의 ‘철학적 진리’를 발견해 냄으로써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티만큼의 반플라톤주의의 길을 걷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누스바움이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소설 읽기가 타당한 도덕 및 정치 이론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무비판적 근거로서가 아니라)을 하는 통찰들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소설 읽기가 도덕 및 정치 이론의 규범적 결론으로부터—그것이 얼마나 완벽하든 간에—시민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도덕적 능력들을 발달시켜 준다는 것이다.” (46쪽)
누스바움은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도덕이론이나 정치이론을 만드는 데 필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고, 또 시민들이 도덕적인 능력을 함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철학이 소설이나 시의 효용성을 사적인 영역에 국한시키려 노력해 온 것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것으로서 그 공적인 유용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문학적 상상력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공적인 판단에서 요구되는 공평성이나 보편성과는 무관하다는 인식을 바꾸고자 시도한다. 누스바움이 문학적 상상력의 공적인 효용을 주장하는 근거는 문학작품이 공리주의적인 계산을 통해서만 사태를 보려는 경제학적 사유가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진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는 과학을 표방하는 이론들이 “인식 가능한 세계의 질적인 풍성함,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그들의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 사랑, 두려움 따위는 보지 못한다. 또한 인간으로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의미 있는 삶은 어떤 것인지 등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신비하고도 지극히 복잡한 어떤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복잡함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언어들과 사유의 능력을 통해 접근해야만 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73쪽)라고 말하면서, 소설만이 그와 같은 것을 보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스바움이 소설이 과학적 이론을 대체해야 한다거나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소설이 불완전한 길잡이를 제공할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소설을 통해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비판적인 판단을 연습하는 ‘분별 있는 독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다만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과학적 이론은 인간적인 가치에 관한 성찰에 의해서 인도될 때에만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누스바움의 희망대로 문학적 상상력을 함양한 정치인이 더 나은 정치적 성과를 이루어낼 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속이며 막말이나 해대는 저질스런 정치인이 되지 않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은유적인 어휘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정치인이 문학적인 메타포로 상대를 비판하는 정치 환경이라면 저질스런 정치인들에게서 느껴야 하는 스트레스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당장은 그런 정도만으로도 소설과 시의 정치적 효용은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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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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