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 16일부터 사진전


정방폭포 (서귀포시 동홍동)

정방폭포 상단과 이어지는 소남머리에서는 서귀면 일대의 주민뿐만 아니라 남원면 의귀, 수망, 한남리 주민과 중문면, 멀리 안덕면 동광리 주민 등 산남지역 전체에 이를 정도로 많은 주민 희생이 있었다. 중산간지대 초토화 작전 이후 야산을 헤매던 피난민들이 붙잡히면 이 곳 군부대에서 취조당하고 처형됐다. 특히 당시 대동청년단원들로 하여금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하는 등 학살은 광기를 띠고 있었다.

# 사진 촬영: 제주민예총(1997), 제공=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하 동일). 
제주는 결코 아름답기만 한 섬이 아니다. 땅 아래 피눈물 섞인 역사가 자리잡고 있음을 알리는 전시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16일부터 사진전 <세계자연유산 제주, 그 아름다움 너머> 전시를 박물관 1층 부출입구 회랑 전시실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진행 중인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 특별전과 연계한 행사다. 사진전은 아름답고 평화롭게만 보이는 섬, 제주의 뒷모습에 담겨 있는 아픈 상처를 공감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됐다.

전시 구성은 성산일출봉, 정방폭포, 천제연폭포, 오름, 돌담 등 제주 풍경 사진과 사진 속 장소에서 4.3 당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한 글을 모았다.

관람객은 그동안 ‘세계자연유산’, ‘힐링의 섬’, ‘이주 열풍’으로만 이해하던 제주가 알고 보면 참혹한 역사를 간직한 아픈 섬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제주의 그 아름다움 너머에는 주민들의 아픔이 서려 있다. 명소 상당수가 4.3 당시 집단 학살이 이뤄졌던 곳이거나 주민들의 희생지였다.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해변이 그러했으며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던 마을, 지금은 아름드리 팽나무와 무너진 돌담만을 흔적으로 남긴 ‘잃어버린 마을’이 그러한 곳”이라고 설명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진오 관장은 "4.3 특별전과 이번 사진전을 통해 많은 관람객들이 4.3의 역사를 이해하고, 평화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3월말에 개막한 특별전 <제주4.3, 이젠 우리의 역사>는 현재까지 관람객 5만 여명을 돌파했다. 이러한 관람객 추이를 반영해 특별전도 사진전 폐막일인 오는 7월 3일까지 연장한다.


제주 관덕정 (제주시 삼도동)

제주시 삼도동에 위치한 관덕정은 조선시대 제주관아의 일부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관덕정과 주변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주요 관청들이 모여 있었던 제주의 정치, 행정의 중심이었다. 이런 까닭에 각종 행사와 기념식, 집회 등이 관덕정 앞광장에서 이뤄졌다. 특히 제주4.3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던 1947년 3.1절 집회 역시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시작돼 이곳에서 사건화됐다. 4.3의 와중에는 사살된 무장대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시신을 걸리기도 한 격동의 공간이었다. 관덕정 광장은 제주의 민주화운동, 4.3진상규명 운동, 탐라입춘굿 등이 행해지는 제주 역사의 중심이기도 하다.

# 사진 촬영: 제주민예총(2012)

성산일출봉 우뭇개동산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해방이 되자 일본군들이 버리고 간 다이너마이트가 주민들의 고기잡이용으로 많이 사용됐다. 그러던 중 4.3이 발발하자 1948년 겨울철부터는 마을마다 민보단 등을 꾸려 자체 경비를 강화하면서 이것을 경비용으로 준비해 마을 초소마다 보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가 돼 오조리 주민 30여 명이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 사진 촬영: 제주민예총(1997)

성산포 터진목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1948년 11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성산의 성산리,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의 주민들이 터진목에서 희생됐다. 여기에서는 인근 마을 뿐만 아니라 구좌면 세화리, 하도리, 종달리 등에서 붙잡혀온 주민들도 희생됐다.

# 사진 촬영: 제주민예총(1995)


백조일손지묘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950년 8월 20일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학살된 모슬포경찰서 관내 주민 132명의 시신이 집단으로 모셔져 있는 곳이다. 당시 유족들은 6년 간 시신 인도를 강력히 거부하던 군 당국과 가까스로 타협을 본 후 흙탕물 속에 뒤엉킨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양수기까지 동원하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습한 시신은 구별이 어려워 ‘百祖一孫’(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켜 하나가 됐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다)이라 정했다.

# 사진 촬영: 제주민예총(2013)


봉성리 자리왓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봉성리 자리왓은 250여 년 전 남평 문씨 일가가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뤄 살던 곳이다. 약 30여 호에 150여 명의 주민들이 밭농사를 지으며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소개하라는 토벌대의 명령이 내려지자 주민들이 아랫마을로 이주했다. 그리고 곧 이어 벌어진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은 전소돼 잿더미가 되었고, 이 와중에 5명이 희생됐다. 현재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 사진 촬영: 제주민예총(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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