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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열 시인, 1983년부터 써온 4.3시 모은 시선집 《꽃 진 자리》 발간

기사 제목을 이렇게 달면 김수열(59) 시인은 분명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기자와 시인 사이 세월의 간격이 20년이 훌쩍 넘고, 얼굴을 익히며 알아간 지도 몇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인을 기억하는 여러 순간을 모아보면 거창하게 부각되거나 나서는 것을 썩 반기지 않는 성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열의 시가 기억된다고 말하는 건 이미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1982년 등단해 1983년 <이장>을 발표한 이래 세상에 꺼내 보인 6권의 시집 속 작품들은 ‘시’로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소리, 노래, 마임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생명력을 부여받아 우리에게 툭툭 다가왔다. 

민요패 소리왓의 소리극 <한 아름 들꽃으로 살아>, 최상돈의 노래 <정뜨르 비행장>, 김성훈의 <입산>, 박순동의 <보말죽>, 타카피의 <제주의 봄>, 시노래운동 단체 '시를 노래하는 달팽이들'의 연작 등 그의 시는 다른 예술로 이식돼 살아 숨 쉰다. 

4.3 70주년에 맞춰 시인의 4.3 시만 모은 시선집 《꽃 진 자리》(걷는사람)가 최근 나왔다. 36년 동안 마흔일곱 편. 큰 의미 없는 산술로 따져보면 1년에 1.3편 꼴이다. 그리 많지 않은 숫자다. 그럼에도 독자와 동료 예술가들이 김수열의 시를 읽으며 감명 받는 이유는 바로 ‘섬의 언어’로 표현해서다.

김수열 시인은 그 슬픔을 육지의 언어인 수직적 관점으로 보지 않고 제주 바다와 같은 수평적 관점으로 본다. 
- 이산하 대안연구공동체 시인학교장(장편 서사시 <한라산> 저자)
그 섬의 무가처럼 혹은 민요처럼 그 땅의 언어로 노래하기 때문에 그의 시들은 우리에게 특별히 큰 감동의 울림을 준다.
- 현기영 소설가
섬의 언어는 무엇일까? 시인이 누누이 말하듯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를 시로 옮기는 것이 아닐까. 얼굴을 마주하며 흙을 만지며 귀 기울이는 단어, 문장, 그리고 감정까지 오롯이 담아내기에, 김수열의 시는 가슴을 울리는 ‘섬의 언어’로서 진화한다. 난해하지 않고 편안히 이야기하듯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먹먹해지는 글의 특징은, 허허실실 사람 좋은 웃음 속에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시인 성격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 같다.

무신 죄로 죽어졈신디도 몰르고
무사 죽염쑤겐 들어보도 못허고
하도 칭원허고 서러완
아이고 울어지지도 안 허여라
- <이승 저승>에서 

노란 봄에 취해
한때 쑥밭이었던 서우봉을 내려오는데
뒤따르는 통곡 소리 통곡 소리
쑥 쥔 손이 너무 불편하다
- <서우봉 쑥밭>에서

비바람으로 와도 좋습니다
먹장구름으로 와도 좋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 오셔서 
차마 잊지 못한 마흔여섯 해
어찌 살아왔느냐 물어도 보고
이리 살고 있다 대답도 하면서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자들끼리
이승도 못 오고 저승도 못 가는 
흐르는 넋들은 그런 넋들끼리
- <한 아름 들꽃으로 살아>에서

《꽃 진 자리》는 한 시인의 예술 철학을 농축한 일종의 엑기스다. 첫 번째 <섬사람들>부터 마흔일곱 번째 <4.3넋살림>까지 읽다보면 시인만의 문법, 시간의 흐름, 발자취 등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특히 세찬 바람을 맞고 자란 섬사람임을 증명하는 듯, 시인은 바람을 즐겨 사용한다. 바람은 4.3 학살 그 자체가 되거나 혹은 70년 전 제주도민들의 울분, 그리고 3만여 영령이 된다.

▲낙선동에서는 그날의 바람을 되새기지 않는다 - 낙선동
▲바람 불 때마다 내가 부르는가 여기거라 - 물에서 온 편지
▲4.3의 횃불과 죽창 그리고 미친 가슴을 싣고 간 바람은 - 사월의 바람은
▲바람도 비껴 선 자리 동백꽃 진 자리 - 꽃 진 자리
▲회오리치던 바람을 마른 땅 언저리에 묻어두고 - 이장移葬
▲칼바람에 질려 수평선으로 날아간 바람까마귀처럼 - 이제는 함께해야지요
제주시 아라동, 조천읍 낙선동, 서귀포 보목리, 조천읍 북촌리, 동문시장, 대정읍 백조일손지묘, 서귀포 송산동, 함덕리 서우봉, 조천읍 신촌리, 서귀포 신효동, 제주시 봉개동, 성산읍 터진목 등 《꽃 진 자리》에는 섬 곳곳에서 시인이 캐낸 4.3의 역사, 흔적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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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열 시인.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시인은 책 후기에서 “1983년 <이장>을 발표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낮은 목소리로 항쟁의 노래를 불러왔으나 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4.3항쟁 70주년을 맞아 주변 문우들의 부추김에 기대어 그 부끄러움을 한데 모아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 정리를 하면서 행과 연을 다시 생각했고, 어색한 표현과 맞춤법을 다듬었다. 근본이 부실하다보니 분칠을 해도 매한가지”라며 “그래도 욕심을 부려본다면 이 시집이 그저 아름답고 청정하다는 내가 사는 섬, 그 그늘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피와 눈물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소감을 남겼다.

4.3이 70년이 되는 동안 시인도 나이를 먹었다. "피로 얼룩진 우리들의 사월이 끝내 내릴 수 없는 깃발임을 그대는 아는가"라고 외치며 시와 마당극을 누빈 청년 김수열은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고 있다. 강산이 바뀌듯 4.3을 둘러싼 환경도 많은 부분 달라졌다. 4.3진상규명운동이 지금까지 이룬 많은 성과에,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다는 인식도 높다. 《꽃 진 자리》가 흡사 한 예술인의 족적을 정리하는 회고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김수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오늘날의 4.3, 앞으로의 4.3을 기다리는 건 비단 기자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4월말 열린 <2018 전국문학인 제주대회> 두 번째 날에 토론자로 참여한 장이지(본명 장인수) 제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4.3 시에도 고전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고전 시를 많이 읽히고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조언을 남겼다. 그래서 김수열 시인의 《꽃 진 자리》는 더욱 의미가 남다르다. 

이 뿐 만이 아니다. 최근 한그루·시옷서점의 절판 시집 복간 프로젝트 ‘리본시선’으로 첫 시집 《생말타기》(1992)를 다시 선보인 강덕환 시인, 4.3에 강정까지 제주의 아픔을 온몸으로 부르짖은 김경훈 시인, 4.3연구자로 뻗어나간 허영선 시인 등을 포함해 기자의 부족한 지식으로 미처 알지 못한 제주시인들의 4.3 작품은 더욱 많이 알려져야 한다.

《꽃 진 자리》는 4.3이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한, 4.3을 기억하는 예술인들이 남아있는 한 계속 읽히는 시집이 될 것이다.

걷는사람, 109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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