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90) 김정한,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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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한,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 소명출판, 2013. 출처=알라딘.
광주 망월동에는 5.18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다. ‘5.18 민주묘지’로 이름 붙여진 국립묘지가 잘 단장되어 있다. 입구에는 방명록이 놓여 있고, 관련 자료를 모아 놓은 전시관, 가지런한 묘역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조형물이 잘 정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겉보기에 좋아 보이는 ‘국립묘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국립묘지로 조성된 이곳의 ‘신 묘역’에서는 20대 혈기 넘치던 시절 가슴 절절히 느꼈던 ‘비극의 광주’, ‘저항의 광주’, ‘혁명의 광주’를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월동을 방문할 때마다 먼저 찾아가는 곳은 새롭게 조성된 묘역에서 한참 떨어져 후미진 곳에 위치한 ‘구 묘역’이다. 그곳에서 ‘열사’라 불리었던 사람들, 나이 먹어 가면서 청년 시절 저항했던 바로 그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렇게 목 놓아 외쳤던 정의와 민주주의는 잊고 그 시절의 열정에 비하면 ‘작고 보잘것없는’ 일신의 안녕을 위해 사는 나의 세대와 달리 젊디젊은 청년 그대로의 ‘형들’과 ‘누나들’이 거기에 누워 여전히 민주주의와 혁명을 외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묘지명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 

여전히 ‘북한군의 개입’ 운운하며 의미를 폄훼하려는 극우파들이 있지만 이제 광주는 국가의 이름으로 기념된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성취된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호명되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세대에게 광주는 마음의 ‘부채’였고, 투쟁의 ‘동력’이었으며, 운동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주가 국가에 의해 기념되고, 감흥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 높다란, 그래서 권위주의적으로 느껴지는 기념조형물에 뒤에 감추어지고 있는 현실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망월동을 찾아갈 때마다 찾아오는 뭔지 모를 허전함은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일까? 혁명과 진보의 정신은 망월동 묘역에 잠들어 있는 ‘동지들’의 묘비 속에 가둬 두고 그들의 희생을 대가로 얻어진 민주주의를 ‘권력’으로만 향유하는 소위 86세대의 이율배반적 태도가 대리석으로 장식된 ‘국립’ 묘지가 풍기는 박제된 엄숙함과 겹쳐져 불러일으키는 씁쓸함일지도 모르겠다.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책 『1980 대중봉기와 민주주의』에서 저자 김정한이 정치학자 최장집을 인용하면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이 필자의 착잡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5.18 광주항쟁의 강력한 감화력에 힘입어 1980년대에 5.18 시민군을 모델로 삼아 혁명적 주체성을 꿈꾸었던 이른바 386세대는 사회운동에서 탈동원되고 민주정부에 참여하거나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시민단체에 관여하면서 점차 지배엘리트로 통합되었으며, 이제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앞장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 196쪽
김정한이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것처럼 1980년대와 1990년대 지적이고 도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소위 운동권은 5.18을 ‘혁명’과 ‘봉기’로 해석했다. 실제 광주에서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평범한 시민들의 정서와 감정, 체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전사’와 ‘투사’라는 상징으로 뭉뚱그려져야만 했다. 종종 5.18은 교조적으로 해석된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론의 격자에 끼어 맞추어져야 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렇게 상징화된 5.18이 민주화운동의 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운동권이었던 그때나 정치 권력을 거머쥔 지금이나 엘리트인 ‘그들’에게 삶을 견뎌내고, 살아내야 하고, 그렇지만 1980년 5월 항쟁의 마지막 날에 도청에서 죽어갔던 평범한 사람들은 이념적으로 구성된 ‘민중’에 부합할 때만 의미 있는 주체들이었다. 1980년 광주의 시민들은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군부독재와 쿠데타세력을 비판하며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염원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자유민주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55쪽) “‘혁명적 요구’는 전혀 제기된 바 없으며, 노동자와 하층민의 ‘계급의식’이나 ‘민중의식’도 그 독자성을 입증할 수 있을 만큼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67쪽)

1980년 광주 시민의 ‘평범함’은 그들의 역사적 유산을 손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함을 ‘투사’와 ‘전사’로 치켜세웠다가 실제의 사람들과 이념 속의 ‘주체’가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을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포기’의 근거로 내세웠던, 혁명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낡은 질서 속으로 투항했던 엘리트들의 태도가 5.18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대안국가도 계급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5.18 광주항쟁이 보여준 것은 대중봉기의 가능성과 힘이었다. 그 원천은 자유민주주의에 내재해 있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적 보편성이었으며, 그것은 과거의 대중봉기의 역사가 지배이데올로기에 새겨 넣은 저항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적 반역이란 피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상상이 기입되어 있는) 지배이데올로기의 보편성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에 부응하는 결과를 획득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라고 했고(중략), 또한 풀란차스는 피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생활양식에서 유래하는 요소들이 스며들어 있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준거 틀 내에서 체계에 반란을 일으킨다고 했으며(중략), 랑시에르는 평등을 선언하는 법과 불평등한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법 앞의 평등이 불평등한 현실을 은폐한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문장을 입증하기 위해, 즉 평등을 증명하기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라고 했다.” - 61쪽
언급된 이론가들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주장은 평범한 사람들은 대단한 혁명의식으로 무장해서가 아니라 질서가 부여하는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저항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책의 후반부에서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와 민중적 문화의 중요성을 역사연구의 핵심으로 부각시킨 에드워드 톰슨(E. P. Thompson)을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274-281쪽)
※ 독자들에게 이미 고전이 된 톰슨의 책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권한다. 국역본 상·하권 모두에 서문이 실려 있다. 분량이 부담스럽다면 ‘서문’만이라도.

 86세대가 만약 1980년의 항쟁을 톰슨의 관점으로 이해된 평범한 사람들의 저항으로 이해했다면, 그리고 그들의 주체성은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단순화된 범주로 묶일 수 없기에 언제나 역동적인 ‘형성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념’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엘리트집단이었기에 좌절은 ‘절망’이 아닌 ‘변절’과 ‘타협’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에 있다. 구실은 있었다. 혁명의 전범으로 생각했던 사회주의권이 무너졌다는 것을 핑계로 삼았다. 이미 오래전에 서구의 좌파들에게 비판받았던 낡은 이념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였던 자신들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그리고 형식적인 민주화가 그들에게 허용한 정치 참여의 기회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언제나 ‘형성과정’에 있듯이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없는, 결코 도달할 수 없으나 ‘도달해야만 하는’ 운동의 원리였지만 86세대는 자신들이 성취한 미약한 ‘민주화’에 도취되었다. 

혁명을 포기하고 사회진보에 대한 열망을 접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형성되었다. 혁명의 이상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저항의 정신은 형식적 민주화에 의해 증발되어 버렸다. 그리고 혁명의 주체였던 민중과 노동자계급은 혁명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평범해서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주체들이었다. 역설적이었지만 그렇게 혁명, 노동자, 민중을 쓰레기통에 내던져 버렸을 때 사회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아주 노골적으로 재편되었다.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후 강력하게 추진된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쳤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겨나지 않았다. 불평등은 더욱 심해졌고 사회는 조각나 파편화 되었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이런 불평등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 졌다. 악화되는 불평등이 낳고 있는 불만을 수용하기에 지금의 민주주의는 너무나 미약하다. 정치마저도 상품화되었고 우경화되었다. 정치가 이렇게 타락해서 기존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커지는 만큼 혐오와 테러에 기반한 극단주의가 침투할 허점은 커져 갔다. 이런 현실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불만은 높아져 간다. 

시장자유주의가 약속했던 당연함과 체험하고 있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그리고 그 약속이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열망은 아주 강력한 저항, 변화를 향한 열망을 낳고 있다. 그런데 86세대는 이미 권력에 취해 이런 현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혁명적이었던 과거’와 ‘보수적인 현재’를 이어줄 그 어떤 실제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86세대 운동권들이 ‘민중’이라고 호명했던 사람들은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권력에 종속적인 주체이면서도 동시에 그에 저항하는 주체”로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36쪽) 생활 수준과 정치적 억압의 정도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매일 보도되는 ‘갑질’과 끝없는 경쟁에 내몰리는 사람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좌절하는 청년들의 삶은 86세대 엘리트들이 혁명가를 자처하던 시대에 체험되었던 고통보다 덜 하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달라진 것은 이제 지배엘리트로 전화한 그때의 운동권들이 그렇게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5.18 광주가 대리석으로 장식된 ‘국립’묘지와 국가기념일 행사 속에 빛이 바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언제나 앞을 향해 나가야 하는 민주주의는 ‘민주화’로 완결되었으며, 사회를 진보하게 하는 동력이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적 역량은 고작해야 고객과 소비자로 축소되고 유권자라는 낡은 틀 속에 갇혀 있는 지금, 한때 혁명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이런 낡아빠진 생각을 ‘진리’로 믿으며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인용된 내용을 곱씹어 생각해 볼 일이다.  
 
“-- 민주화운동 담론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지속적인 정치적 민주화 과정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민주정부―국민정부―참여정부로 이어지는 민주정부들에 의해 5.18이 제도화되면서 일정하게 완결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민주화 담론을 통한 제도화는 또한 5.18을 ‘박제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5.18이 저항적 상징성을 결정적으로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고, 사회운동 내에서조차 광주항쟁은 점차 주변화되었다.” - 35쪽
“군부독재는 종식되었고 민주주의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5.18 광주항쟁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이것이 5.18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는 국가 담론의 표준적인 해석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역사에 무지하거나 사회 모순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향유하는 혜택의 원천인 5.18 광주항쟁에 대해 감사하지 않는다면 유감이겠지만, 그들에게 기억을 이어가지 못하는 책임을 묻고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앞으로는 5.18과 관련해 제정된 각종 법과 제도들이 우리 대신 기억해 줄 것이다. --중략-- 5.18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평범한 물음에 어떤 사회적 답변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 174~175쪽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 본다. 우리에게 4.3은 어떤 의미일까? 국가에 의해 기념되고 희생자가 법적으로 보상되는 과정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을 잃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리고 필자도 과거를 잊고 이제 엘리트 대접에 익숙해지는 86세대의 끄트머리에 있다는 사실이 그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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