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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열린 ‘제주4.3항쟁 70주년 전국문학인 제주대회’ 국제 문학 심포지엄에 참석한 베트남 소설가 바오 닌(왼쪽부터), 오키나와 소설가 메도루마 슌, 대만 시인 리민용. ⓒ제주의소리

[4.3 70주년 전국문학인 대회] 제주에 모인 바오 닌, 메도루마 슌, 리민용 작가

태평양 전쟁 오키나와 전투, 대만 2.28사건, 베트남 전쟁, 그리고 오키나와 미군 범죄. 무고한 희생을 일으키는 국가폭력은  과거부터 오늘 날까지 멈추지 않는다. 베트남, 일본 오키나와, 대만에서 문학으로 폭력에 맞서온 문학인들이 제주에 모였다. 이들은 “문학인, 예술인들이 나서지 않으면 야만의 시기는 반복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하고, (사)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가 주관하는 ‘제주4.3항쟁 70주년 전국문학인 제주대회’가 27일~28일 한화리조트 제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다.

27일은 국제 문학 심포지엄 ‘동아시아의 문학적 항쟁과 연대’로 진행됐다. 현기영 작가의 기조 강연에 이어 베트남 소설가 바오 닌, 오키나와 소설가 메도루마 슌, 대만 시인 리민용의 발표가 이어졌다.

▲ 국제 문학 심포지엄 현장 모습. ⓒ제주의소리

1952년생 바오 닌은 베트남 전쟁 경험자로, 그가 1991년에 펴낸 소설 《전쟁의 슬픔》은 영국, 덴마크, 일본, 한국에서 문학상을 받았고 16개 외국어로 번역됐다. 대만 2.28 사건이 벌어진 해(1947년) 태어난 리민용은 문학을 통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국내에서는 시집 《자백서》 등으로 알려져 있다. 메도루마 슌은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운동에 적극 투신하며 소설 <물방울>, <넋들이기>, <눈 깊숙한 곳의 숲> 등을 발표했다. 

세 사람 모두 선명한 작가 정신으로 높이 평가받는 문학인이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반인류적인 폭력의 역사 앞에 문학, 문학인이 가져야 할 자세를 이야기했다.

# 베트남 전쟁: 바오 닌

▲ 바오 닌 작가. ⓒ제주의소리
바오 닌은 1969년 17세 나이에 군에 입대해 1975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20세기 말까지 베트남 문학은 승전, 전쟁영웅 홍보, 애국심 추동 일색이었다고 설명했다. 바오 닌은 군인 출신 작가였지만 이러한 시류에 따르지 않았고 상처, 희생자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고 작품을 썼다. 

바오 닌은 “승전을 치켜세우는 문학이 즐비해도 내 머리 속에는 ‘민족 입장에서 전쟁은 겪어서는 안될 끔찍한 재난이자 굉장히 불행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을 썼는데, 당시 베트남 정부는 내 작품을 싫어했다. 정부, 공산당, 기자, 평론가 모두 비판을 가하며 수난을 겪었다”고 기억했다.

바오 닌은 “전쟁이 끝난 1975년, 베트남 인구는 4000만명이었다. 전쟁으로 400만명이 희생됐다. 평화로운 오늘 날, 베트남의 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며 “정치가, 역사가 그리고 작가는 끔찍한 역사를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게 반드시 밝혀야 한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모인 작가 동지들이 20세기 벌어졌던 야만적인 폭력의 기억을 되살리는 창작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야만의 시기는 반복 될 수 있다”고 경각심을 울렸다.

# 오키나와: 메도루마 슌

▲ 메도루마 슌 작가. ⓒ제주의소리
메도루마 슌은 오키나와 이전에 존재했던 독립왕국 류큐부터 섬의 역사를 들려줬다. 동시에 자신이 왜 집필과 독서마저 멈추고 미군 군사기지 반대 운동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지 들려줬다.

메도루마 슌은 “19세기 일본 메이지유신이 벌어지면서, 1879년 류큐왕국은 오키나와 현으로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할머니가 해주신 말을 기억해보면 당시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 이름의 성(姓)을 바꾸고 말도 쓰지 못하게 했다. 류큐가 아닌 일본이 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오키나와에게 돌아온 건 전쟁이었다”며 “오키나와 전쟁 당시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스파이 취급하거나 식량을 뺏으며 탄압했다. ‘미군보다 일본군이 무섭다’는 할머니 말이 기억난다”고 밝혔다.

전쟁으로 수많은 오키나와 민간인이 희생됐지만,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각종 범죄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메도루마 슌은 “어머니가 11살이던 시절, 속옷 차림의 미군이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강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전 20살 오키나와 여성이 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을 바라보지만, 오키나와는 가혹한 현실이 이어지는 건 변함없다”며 "젊은 세대가 역사적 사건을 체험하는 건 시, 영화, 소설 등을 통해서 가능하다. 비록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들이 쓰는 문학 작업이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계속 시도해야 하는 이유"라며 "오키나와 작가에게는 오키나와 전쟁, 미군 문제가 문학 작업의 큰 축"이라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그는 “나도 소설을 더 쓰고 싶지만 미군과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새로운 해군기지(헤노코) 반대 운동이 시급하다. 극우 성향인 아베 정권이 끊임없이 오키나와에 압력을 가하고 있어 큰 위협을 느낀다. 우리가 굴복한다면 오키나와는 또 다시 (국가폭력의 광풍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 대만 2.28: 리민용

▲ 리민용 작가. ⓒ제주의소리
리민용은 대만 2.28사건이 벌어진 1947년 태어났다. 그는 대만 2.28사건이 일제식민통치나 다름없던 국민당의 탄압으로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리민용은 “1945년 10월 25일 중화민국 대표연합군은 대만을 무력으로 접수한다. 이후 중국 본토가 중화민국(국민당)이 중화인민공화국(공산당)으로 대체된 후에, 대만으로 망명한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는 점거통치하고 있던 대만을 반공(反共)과 반격의 기지로 삼았다. 일당화를 추진하고 장기적인 계엄통치를 실시했다. 1949년 제정한 헌법을 동결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통치를 저질렀다”고 2.28사건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1947년 2월 28일 일어난 2.28사건은 관방이 사제담배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충돌이 그 원인이지만, 사실은 중화민국의 점거통치, 대만 행정장관공서의 탐욕과 부정부패에 대해 그동안 쌓였던 사람들의 원망이 촉발된 것”이라며 “사람들은 힘을 모아 봉기했고 각지에서 관공서를 포위했다. 대만 행정장관공서는 우선 민의가 반영된 중재위원회의 존재를 받아들였지만 난징 정부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3월초 군대가 상륙한 후 피비린내 나는 진압이 전개됐다. 희생자는 2만여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리민용은 “1970년대, 대만의 많은 시민들은 국가 지위와 존재론적 환경에 대해 심각히 고민했다. 문학인들은 1977년 향토문학논쟁으로, 더 이상 관방의 통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회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어진 선거에서 정부의 부정행위 역시 저항에 부딪혔고 시민 역량의 각성을 보여주는 민중항의가 촉발했다”며 대만의 민주화 과정에서 문학이 끼친 영향을 강조했다.

특히 “1979년 대만 미려도 사건(1979년 12월 19일 세계인권의 날 시위와 진압)과 1980년 한국 광주민주화운동을 비교하면 시점은 거의 일치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47년 2.28사건과 1948년 4.3사건 역시 시대가 상당히 비슷하다”며 “역사는 일찍이 대만에도 한국에도 수많은 상흔을 남겼다. 정치가들이 법질서를 통해 국가를 건립한다면, 문화의식은 길을 찾기 바라는 시민들을 위해 마음 속의 등대가 돼야 한다”고 예술 문화의 역할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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