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87) 마르틴 부르크하르트(원서: 2008년)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 김희상 옮김(2011년),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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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틴 부르크하르트(원서: 2008년)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 김희상 옮김(2011년), 알마. 출처=교보문고 홈페이지.

4월16일. 오늘은 세월호 참사 4주기다. 2014년 4월 15일 밤, ‘세월호’라는 여객선이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중, 다음날 16일 오전 8시 50분 쯤 진도 맹골수도 해역에서 갑자기 기울기 시작, 급기야는 물속으로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304명(이 가운데 단원고 학생 250명. 교사 12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수학여행 길에 오르는 학생들은 아마 그날도 학교 등교 때처럼 ‘당연하고 사소한’ 한 마디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와’라는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집을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이 대한민국 역사를 발칵 뒤집어 놓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우리 역사에서 해상사고가 비단 이번 사건뿐이었겠는가 만은, 이번 ‘세월호’ 사건은 유가족을 넘어서 전 국민을 슬픔과 분노에 빠트린 국가적 사건이었다. 사실, 당시 날이면 날마다 이를 알리는 언론도 한몫했다. 국민들은 일상을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한 적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공권력의 깊숙한 현장과 이해관계로 이합집산하는 돈과 권력의 민낯을 접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급기야 애도와 분노에 찬 촛불민심이 전국적으로 타올라 관련 책임자 처벌이며 사회안전망 점검, 마침내는 정권교체를 앞당기기도 했다. 

세월호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아무리 미약하고 미시적인 행동(부분/개개인의 슬픔과 분노)일지라도 슬픔과 분노가 연대하여 이를 공론화하면 거시적인 세계(전체/정치권력)의 상식을 뒤엎고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됨을 몸소 체험하였다.

4월이 오면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대한민국의 역사가 있다. 올해 70주기를 맞는 ‘제주 4·3’이 그러하다. 4년 전 세월호 사건이 부분(개개인의 슬픔과 분노)의 힘이 모여 전체(정치권력)의 전횡을 규탄한 사건이라면, 제주 4·3은 전체, 즉 국가 공권력이 부분(개개인의 사상적 자유와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제거(?)한 사건이었다. 개인(부분)보다 국가(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희생되어도 좋다는 사상이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행되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세월호 사건의 100배나 되는 3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음에도, 이로 말미암은 상처·슬픔·분노는 고스란히 땅 속에 묻혀 침묵을 강요받아 왔다. 이땐 언론도 침묵으로 한몫했다. 그러므로 ‘제주 4·3’은 도민들 개개인의 체험과 상처에 대해 서로가 ‘속솜허라(일체 입 밖에 꺼내지 말라)’는 생존전략인 기억 지움의 훈련을 통해 애써 지우려했던 망각의 역사였다.

국가 공권력이 ‘망각의 역사’를 주도했다고 해서 희생자 개개인들의 기억과 상처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전체)가 보기에 개인(부분)의 자유와 사상이 미약하고 사소하게 보일지라도, ‘사소함’들이 모여 인류의 사상과 역사를 만들어왔고 만들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고 있다. 

제 아무리 미약하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 진정성이 통하면 종국에는 위대해지는 법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책 마르틴 부르크하르트의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이 주는 교훈이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은 어느 심오한 사상가가 쓴 책이기 이전에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게끔 지혜와 용기를 선물하는 고마운 친구”(8쪽)라고 정의한다. 정말 심오한 사상은 이미 일상생활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진정 철학을 한다 함은 일상생활의 이면 혹은 심연에 숨은 뜻을 가려내는 놀라운 능력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전체주의의 시선 또는 거대담론이 배척한 일상의 ‘사소함’들이 실은 얼마나 위대한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잉태해서 그 명맥을 지금까지 잇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책 제목만 보고 이 책을 ‘당연하고’ ‘사소한’ ‘쉬운’ 철학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느 정도 철학, 종교,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에 대한 배경 지식도 요할뿐더러, 저자 특유의 비유와 비약, 암시 화법에 익숙하지 않으면 미궁을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원제(독일어) 'Eine Kleine Geshichte der grossen Gedanken'를 직역하면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다. 번역한 한국어 제목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2011년)과 대조해 보면 그 의미가 미묘하면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전자, 원제를 직역한 제목이 더 자연스럽고 이 책의 내용에 근접해 보인다. 여담이지만 본서가 최근에《35가지 호기심으로 배우는 인문학의 생각법: 지적 생활인을 위한 일상 인문 가이드》(2015년)로 한국어 제목을 바꿔 시중에 나온 것을 보고 독자인 나로서는 매우 당황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번역서 제목이 원저자가 의도한 생각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는 생각에서다.

이 책은 내용면에서 인류 역사상 인간의 인식과 사상을 바꾼 35개의 명제를 추려 연대기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ABCD…알파벳의 탄생 배경에서부터 동전, 김나지움, 진리, 십자가, 순결, 아르바이트, 시계와 톱니바퀴, 중심 투시도법, 제로, 자연, 진화, 무의식, 컴퓨터, 섹스, 정보사회, DNA 등 역사의 굵직한 현안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 역사적 사실과 변화, 사상가과 일반인들의 사고 등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엮으면서 각 현안들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사상으로 이어져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딱딱한’ 철학서와는 그 결을 달리한다.

가령, ‘눈속임 기술’(123~127쪽)에 할애한 장을 살펴보자. 이 장에서 저자 마르틴 부르크하르트는 구체적으로 서양 중세에 탄생한 ‘중심투시도법(perspective)’이라는 그림 그리기 기법에 주목한다. 우리 주변에서는 이를 ‘원근법’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심투시도법이라는 말은 ‘투과하여 보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perspicere’에서 유래하였고, 대상을 전체 공간과 관련하여 파악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가령 선 원근법은 삼차원의 대상물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대상들이 이루는 공간 내에서의 원근을 표현하기 위해 소실점(vanishing point)을 도입하였다. 이야기 속 중요도에 따라 대상세계의 크기와 위치가 배열되는가 하면, 시각적·입체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학적 계산에 따라 배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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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룩 테일러(Brook Taylor)의 저서 《선(線) 원근법의 새 원리들(New Principles of Linear Perspective)》(1811년)에 실린 삽화. 제공=고영자. ⓒ제주의소리

그림에서는 선과 면들이 화면 중앙의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이게 함으로써 공간사상(3차원)을 평면(2차원)에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회화기법이다. 이는 서양 르네상스기 발명품으로 이를 두고 문화역사가들은 르네상스가 ‘세계와 인간을 재발견했다’고 정리할 정도였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볼 때 중심투시도법이 적용된 그림은 실제의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세밀하고 생생하여 오랜 세월 그 현실성을 인정받다 보니, 그것이 인위적인 기술이고 발명임을 수시로 잊곤 한다. 어쨌든 “중심투시도법이라는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세계관을 낳았다.”(125쪽)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심투시도법이라는 고정된 시선에 길들여져 왔다.

여기서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점은 중심 중시 관점이 화가들만이 아니라 중세 사회 전반에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중심투시도법은 그림 그리기 기법을 넘어서 현실적으로는 공간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기술로써 지도학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림의 소실점과 더불어 이미 알고 있는 지평 너머까지도 보고 싶은 갈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126쪽)

어디 그뿐인가. 중심 중시 관점인 중심투시도법은 정치와도 아주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치가들의 말투나 권력공간의 설계 및 권력의 언어, 이를테면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공언했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말 속에서 공동체의 모든 이해는 태양-왕-권력-남성-중심으로 돌아가고 집약되는 메커니즘이 그러하다. 이에 백성들은 이 중심 중시 사상을 마치 진리인양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중심투시도법이 ‘트롱프뢰유(trope l’oeil)’ 즉 ‘눈속임’을 뜻하는 개념과 한 쌍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런 환각의 효과는 워낙 강렬해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그 공간에 있는 것만 같이 느끼게 한다.”(125쪽)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이탈리아의 성직자 사보나롤라(G. Savonarola, 1452~1498)는 그림은 자연을 모방한 것이어야 하지만 거기에 생동감, 곧 신의 호흡이 빠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인공의 자연”(125쪽)임을 피렌체 백성에게 설파하며 회개하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동시대인이었던 사보나롤라는 이탈리아의 종교개혁자로 교회의 부패와 메디치 가문의 전제에 반대해 신권정치를 단행, 로마 교황과의 대립으로 화형된 인물이다.

이러한 기조로 이 책은 ‘자연, 잃어버린 낙원’(169~173쪽)라는 장에서 프랑스 철학자 루소의 사상을, 그리고 ‘무의식이 의식에게 검열당하다’(217~222쪽)라는 제목으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사상을 다루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사회동물이 사회라는 기계 안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인간다움에서 멀어지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171쪽)
“근본적으로 문화는 어떤 것이든 이런(암호화된) 형태의 왜곡을 담고 있다. (중략) 문화 전반(각종 제도 포함)은 무의식이라는 재판장이 집전하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문화에 불쾌감’을 가져야 마땅한다. 문화는 우리에게 통조림과 조미료와 각종 인공식품을 먹이며, 우리의 원초적 욕망을 무력화하려고만 들기 때문이다.”(프로이트, 221~222쪽).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라 ‘위대한 사상’을 추적한다. 이름조차 기억하기 힘든 ‘죽은 사상가’가 아니라 2천년이 넘게 묵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사상 말이다. 그리고 그 위대한 사상들은 애초부터 위대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엔 미약했으나 점차 성장했다는 점이다. 

한 나라, 한 시대의 사상과 역사는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어떤 원리와 사고방식으로 작동·수습·(재)해석·성장하느냐에 따라, 국민 개개인의 행·불행은 물론 국가의 품격이 결정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4·3’과 ‘4·16 세월호’는 아직 끝나지 않은 대한민국의 역사이며, 위대한 사상의 어머니임을 가슴 깊이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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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자(미학자·번역가)

(사)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대표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기록·제주미학론. 제주도 ‘형태기록’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 《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 《新제주순력담》(2016년), 韓東亀 편저 《제주도: 삼다의 통곡사》(2017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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