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제주 안에서만의 사건이 아니다. 특히 지금도 수 많은 제주인들이 4.3의 기억을 간직한 채 일본에서 지내고 있다. 4.3 7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3월 10일부터 11일까지 오사카에서 열린 ‘제주도4.3사건 7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이다. 일본에서 열린 첫 번째 4.3 관련 국제심포지엄이다. <제주의소리>는 김창후 전 제주4.3연구소장의 심포지엄 참석 후기를 두 차례로 나눠서 소개한다. 단순 체험기 이상으로 4.3을 기억하는 일본 사회의 흐름,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리라 본다. [편집자 주]

[일본 4.3 국제심포지엄] (2) 일본에서 처음 열린 4.3 국제심포지엄

일본에서는 처음 열린 4.3 심포지엄이었다. 그래서인가, '제주4.3사건 70주년 희생자 위령제 실행위원회(이하 실행위)'의 예측과는 달리 행사장은 참가자들로 북적였다. 사실 실행위는 몇 달을 준비하면서 과연 행사에는 몇 명이나 참가할 것인가 노심초사했었다. 그러나 행사가 시작하기 무섭게 사람들이 입장해 빈자리를 가득 메웠다. 

▲ 개회사를 낭독하고 있는 문경수 실행위원(리츠메이칸대학 교수).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 축사를 하고 있는 허영선 제주4.3연구소장.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보통 오사카의 4.3행사는 '재일본제주4.3사건유족회'와 '제주도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오사카'가 공동으로 개최한다. 그러나 올해는 4.3 70주년을 맞는 해로, 지난 60주년 제주도 4.3위령제에 '4.3 고향방문단'을 구성해 방문한 이후 두 번째로 대규모 방문단을 구성하고 있기도 하여, ‘실행위’를 주최단체로 별도로 구성해 심포지엄과 4월의 오사카 위령제를 준비했다. 현재 실행위에는 주로 일본유족회와 생각하는 모임·오사카 회원들이 참여해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이니치들과 일본의 젊은이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궂은일들을 하며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심포지엄, ‘국제사회와 제주4.3 – 일본에서 보는 시각’
    
일본에서 처음 준비하는 행사라 모든 게 힘들었다고 했다. 예산도 마지막 우여곡절 끝에 일부 삭감된 모양이 돼 부족했다. 그러나 실행위 모두 열성적으로 준비했다. 이틀에 걸친 심포지엄의 행사 일정은 다음과 같다.      

3월 10일(토) 

■ 개회사: 문경수(실행위원회), 축사 허영선(제주4.3연구소장)

■ 제1부: 일본에서의 4.3

제1세션 : 일본지역 4.3운동의 발자취와 과제
오광현(재일본제주4.3유족회 회장): 오사카에서의 제주4・3운동
조동현(제주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도쿄): 제주4.3운동에 몸 담아 온 20년을 되돌아보며 - 도쿄에서의 4.3 운동의 역사와 현재
토론 : 김창후(전 제주4.3연구소장), 고이삼(신간사 대표 )

제2세션: 일본에서의 4.3 - 역사적 해명
이지치 노리코(오사카시립대학교 교수): 해방 전후 제주인의 도일(渡日) 경위와 그 배경
무라카미 나오코(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 재일조선인은 ‘4.3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조경희(한국 성공회대학교 교수): 불안전한 영토 밖의 삶 - 해방 이후 70년대까지 제주인들의 일본 밀항과 오무라수용소
토론 : 고바야시 도모코(후쿠오카교육대학교 교수), 박사라(고베대학 교수)

3월 11일 (일) 

■ 제2부: 국제사회와 4.3 

제3세션: 과거와 마주보기
주립희(Rick Lishi Chu, 대만국립정치대학교 교수): 대만의 ‘이행기 정의 촉진조례’ 채택의 의의와 도전
미야기 하루미(기지·군대를 용납하지 않는 행동하는 여성들의 모임): 미일 정치의 협간(狭間)에서 - 오키나와의 미군 병사에 의한 성범죄 실태와 여성들의 대처
고창훈(전 제주대 교수): 미국에서의 제주4.3 문제 해결 청원운동 – 제주4.3 치유 한미위원단의 구성과 전망 (2003-2018)
토론 : 이경원(제주대학교 교수), 허영선(제주4.3연구소장)

제4세션: 4.3진상규명운동 – 특징과 과제
김종민(전 4.3진상규명위원회 위원): 4.3진상규명운동 70년
이재승(건국대학교 교수): 국제기준으로 비춰본 제주4.3 과거청산
토론 : 고성만(실행위원회), 허상수(제주4.3범국민위원회) 

■ 종합토론

제1부는 ‘일본에서의 4.3’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제1세션에서는 일본지역 4.3운동 30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봤다. 제2세션에서는 자이니치들이 4.3시기 다시 일본으로 ‘밀항’을 하게 된 경위와 배경, 오무라수용소 생활, 4.3에 대한 자이니치들의 대응 등을 다각도로 검토했다.

제2부 제3세션에서는 주립희 교수가 대만의 2.28사건과 4.3을 비교했다. 그는 ‘우리가 1947년 2월 28일에 사건이 발발해 4.3보다 하루 먼저 일어났으니 형님뻘이다’라며 재미있게 얘기를 풀어갔고, 오키나와에서 온 미야기 하루미는 오키나와에서 벌어지는 미군 성범죄와 그에 대처해 싸우는 여성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고창훈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미국에서 벌이고 있는 4.3해결 청원운동을 소개했다. 

마지막 제4세션, ‘4.3진상규명운동 – 특징과 과제’에서 김종민은 4.3진상규명운동 70년을 발제했다. 그리고 ‘희생자 인정에서 불가피하게 일부 제외된 자, 즉 배제된 희생자’들에 대해 설명하고, 최근의 4.3정명 문제를 언급했다. 이재승은 4.3과거청산운동을 국제기준 속에서 살펴보고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하고,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4.3은 법적으로 국가범죄이기 때문에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배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젊은 실행위원들

실행위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은 행사의 중심이었다. 비록 이번 행사에서 논문을 발표하거나 토론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거나, 동시통역으로 어학 실력을 뽐내는 건 아니지만 행사의 뒤켠에서 궂은일들을 마다 않는 모습은 일본지역 4.3운동의 미래를 상징했다. 이들이 이번 행사에 참여하게 된 배경은 다양했다. 필자는 이들 몇 명을 개별 면담했다.   

▲ 심포지엄 현장 모습.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 심포지엄 현장 모습.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 김화자, 오카자키 료코(왼쪽부터).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 김한나(왼쪽 끝), 요시즈미 코헤이(가운데).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먼저, 일본인 젊은이로 참가자의 등록을 받고 동시통역기를 나눠주며, 관련서적들을 팔고 있던 오카자키 료코 씨가 있다. 명함에는 리츠메이칸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으로 적혀있다. 오카자키 씨는 아버지는 일본인이시지만, 어머니가 제주 출신 3세라고 했다.   

문: 자이니치 시인 김시종의 언어관에 대해 석사논문을 썼다고 들었는데? 
답: 예, 선생님의 시 중에서 2000년 이후 시들을 대상으로 그 언어관에 대해서 썼습니다. 올 7월에 고려학회 기관지에 번역돼서 실릴 예정입니다.
문: 그 어려운 시를 분석해요?
답: 예…….
문: 또 궁금한 게, 한국어를 잘 하시는데 어디서 배웠나요? 집에서? 어머니한테?
답: 집에서는 거의 한국어를 안 썼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어를 배우려고 한국에 어학연수 차 성균관대학교에 1년 반, 대학원 과정으로 고려대에 1년간 있었죠. 그래서 배우게 됐어요. 
문: 그럼 실행위에는 어떻게 들어오시게 됐나요?
답: 오사카에 ‘원 코리아’ 운동을 하시는 정갑수 선생님이라고 계셔요. 그 분이 소개해줬어요. 그래서 지금 유족회장하시는 오광현 선생이나, 생각하는 모임의 정아영 교수님도 알게 됐고요.
문: 지금 하시는 일은 어떻습니까? 
답: 실행위에는 작년 겨울에 합류했는데 제 전공도 그렇고, 제게는 자이니치의 피도 흐르고 있어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 보람도 있고요. 이 4.3운동이 일본지역에서도 진정한 시민운동으로 거듭나는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가능하면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오카자키 씨는 일이 보람 있다고 했다. 그럼 남성인 요시즈미 코헤이는 어떨까? 그는 양부모 모두 일본인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어는 수준급이었다. 

문: 지금 대학원에 다니시나요?
답: 예. 리츠메이칸대학 문학연구과입니다. 오카자키 씨 후배입니다. 사실 오카자키 선배 권유로 작년 12월부터 실행위에서 일하고 있기도 하고요.
문: 전공이? 그보다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나요? 
답: 현대동아시아 언어문화학을 전공했어요. 석사논문은 한국의 개항기 언어운동에 대한 걸 썼습니다. 독립신문 아시죠? 예, 거기 주시경 선생님 자료를 가지고요. 한국어 공부는 어렵게 했습니다. 부산에서 어학 공부하며 반 년 정도 살았죠.
문: 4.3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답: 대학원 때요. 한국 친구들이랑 같이 공부하면서 자연히 위안부 문제와 같은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알게 됐습니다. 여러 말들이 있지만 일본에서의 조치들이 많이 미흡한 거 같아요. 오늘 ‘밀항자 문제’에 대해서도 논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4.3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났으니 그 분, 밀항자들의 '난민 권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 지금 실행위 일 어때요? 앞으로의 활동은?
답: 보람도 있고요, 우리 젊은이들끼리 정보도 교환하고 해서 참 좋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려 앞으로 제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 취업문제가 걸려 있어서요. 

김화자 씨는 자이니치 3세이다. 현재 ‘KEY(재일코리안청년연합)’의 사무국에서 일하고 있는 전문 시민운동가이다. 그런 그녀가 4.3운동을 같이 하고 있다. 그녀는 한국어가 서툴다. 

문: 김화자 씨는 제가 여러 번 만나네요. 지난번엔 KEY 사무실에서, 오늘은 심포지엄에서, 다음엔 4월 오사카 위령제에서 만나겠네요? 
답: 예. 그런데 제가 한국어가 서툴러서. 
문: 처음 저는 일본사회에서 전문적으로 시민운동을 하는 김화자 씨가 4.3일도 같이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언제부터 이쪽 일도 하시게 된 겁니까?
문: 2014년일 겁니다. 고춘자 씨가 오사카 행사에서 처음 증언하시던 때. 그때 처음으로 4.3을 알게 됐고, 4.3운동의 중요성도 인식하게 됐죠. 오사카의 자이니치 운동 중 개인적인 동기로 모여, 국가폭력을 상대로 하는 운동은 이것밖에 없어요. 4.3운동요. 저는 제주도와 혈연적 관계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운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현장에서 잘 인식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열심히 참여할 겁니다.

김한나 씨는 도시샤대학 박사과정의 제주도 출신 유학생이다. 

문: 학부 때부터 유학 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답: 예, 저는 제주도에서 외국어 고등학교 일어과를 다녔어요. 그래서 자연히 대학 1학년 때부터 리츠메이칸 대학으로 유학을 오게 됐고, 거기서 석사까지 했습니다. 이제 도시샤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입니다. 
문: 4.3일에 참여하게 된 건 제주도 출신이라서, 아니면?
답: 제가 고향이 제주도라서 4.3을 알게 되고, 생각하는 모임에서 일하는 선생님들을 만나게 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저는 학부 때부터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여러 나라 유학생들을 만나면서 평화나 인권과 관련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결된 게 더 크다고 봅니다.
문: 혹시 석사 논문은 4.3과 관련된 겁니까?
답: 예, 제목이 ‘재일제주인 4.3운동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입니다. 박사 논문으로는 집합적 기억 개념으로 자이니치 1세 분들이나 아니면 어느 특정 지역을 다뤄볼 생각입니다. 때문에 저는 일본지역 4.3운동에 앞으로도 더 적극 참여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서울 출신 김현태 씨가 있다. 현재 그는 리츠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의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실행위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실행위를 대표하는 문경수나 오광현도 그가 없었으면 이번 4.3 70주년 오사카 행사의 그 많은 일들, 심포지엄이며, 4.3 고향방문단 구성, 4·22 오사카위령제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 김현태 씨는 한국에 있을 때도 비슷한 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답: 예. 전에 과거사청산위원회라고 있었죠? 저는 과거청산범국민위의 조직인 '포럼 진실과 정의'에서 사무국장 일을 했었습니다. 그 일이 4.3과 비슷해서 좀 익숙한 편입니다.
문: 일본어를 참 잘 구사해요. 지금 몇 년째 일본에 살고 있습니까?
답: 일본에요? …… 아, 벌써 4년째네요. 귀국한다, 귀국한다 한 게 지금이네요.
문: 이번에 일본에서 4.3일을 해보니까 어떻습니까? 한국과는 많이 다른가요?
답: 다르기보다는…… 이쪽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거. 잘 아시겠지만 ‘조선적’을 가진 사람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는 한국에 갈 수 없었잖아요? 그러한 사실에 대한 문제 제기, 총련, 밀항, 오무라수용소 등등 한국정부가 해결해야 할 일이 일본에도 많음을 다시 알게 됐어요. 요즘 다시 공부하며 삽니다.
문: 참, 실행위의 인원은 얼마나 됩니까?
답: 전체적으로 한…… 30명? 유족회에서 5~6명, 생각하는 모임에서 10명, 나머지는 저 같은 운동가들이나 공부하는 학생들입니다. 일본인들도 좀 있죠. 지금 4.3사진으로 판넬전을 준비하고 있는 오카모토 아사야 씨. 대표적인 일본분으로 이분은 대학 강사입니다. 

▲ 4.3 판넬전을 준비하고 있는 오카모토 아사야.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일본지역 4.3문제의 최대 관심사, ‘배제된 희생자’  

이번 심포지엄 종합토론에서 제일 중점적으로 부각됐던 것은 ‘배제된 희생자’ 문제였다. 그 내용은 행사 취지문에 길게 설명되어 있다. 길지만, 이 취지문은 일본지역 4.3운동의 필요성을 새삼 상기시켜주기에 인용해보겠다.   

“2000년에 제정된 4.3특별법은 그 10조에 ‘대한민국 재외공관’에 피해자 및 유족 피해신고를 접수하는 ‘신고처’를 설치한다는 규정을 담고 있다. 이런 규정은 한국전쟁 당시의 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이나 광주사건 등의 과거사 청산 관련 입법에는 볼 수 없는 규정이다. ‘재외공관’이라 되어 있지만, 여기서의 ‘재외’는 주로 일본을 가리킬 것이며, 4.3사건과 재일동포 사회와의 깊은 관련을 시사하는 규정이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식민지 강점기에는 오사카-제주 간에 ‘기미가요마루(君代丸)’ 등 객선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1930년대 중반에는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5만여 명)이 일본에 살았다. 오사카에는 제주도 출신자들의 확고한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일본-한국 간의 경계를 넘는 제주도 주민의 생활권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8.15해방과 더불어 많은 조선인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게 되지만, 한 번 귀환한 제주인들의 다수가 4.3사건을 전후하는 혼란기에 다시 오사카 등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점령군(GHQ)은 한 번 한반도에 귀환한 조선인들의 일본으로의 도항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조선인의 도일은 밀항이라는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밀항과 관련된 여러 자료에 의하면 4.3사건을 전후한 시기(1947~1949년)에 대충 5000명∼1만명의 제주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것으로 추측된다. 4.3사건의 진상규명은 이러한 재일동포 사회와의 관련을 외면해서는 결코 완결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학술심포지엄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4.3사건과 재일동포 사회와의 관련이 역사적으로 조명될 것이다(제2세션). 

‘4.3 콤플렉스’라고도 일컬어지는 사건 체험자의 좌절감이나 심리적인 굴절의 문제도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재일제주인 사회에 깊은 각인을 새겨 왔다. 4.3사건이라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너무 크고 처참했다. 체험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정치나 사회를 마주하는 자세를 크게 바꿔놓았다. 정치 자체를 기피하는 태도는 물론 금품에 대한 철저한 집착이나, 거꾸로 권력이나 조직에 대한 과잉충성 등 4.3으로 인한 심리적 좌절감은 제주 출신 재일교포들에게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본에서도 4.3사건을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암묵적인 압력이 지배해왔던 것이다. 더구나 제주도 출신자가 많은 오사카에서 그런 분위기가 더 짙었다고 할 수 있다. 제1세션의 논의에서도 밝혀지겠지만, 일본에서의 4.3운동은 그러한 4.3사건의 콤플렉스나 침묵의 압력을 무너뜨리고 이를 공론화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4.3운동은 지금 최후의, 그러나 결코 작지 않은 장벽과 마주하고 있다. 이는 재일동포 사회가 한국 사회와 달리 '남'과 '북'이 일본 사회라는 하나의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2001년 헌법재판소는, ‘사령관급 공산 무장병력 지휘관 또는 중간간부, 혹은 무장봉기에 ’주도적·적극적‘으로 가담한 자들은 4.3특별법이 정하는 ‘희생자의 범위’에서 배제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4.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집행기관으로서 국무총리 밑에 설치된 ‘4.3위원회’도, 이 헌법재판소 판단을 따라서 무장봉기를 주도한 남로당의 ‘핵심간부’나 무장대의 ‘수괴급’에 대해서는 희생자로서 인정 못 한다는 희생자 선별의 기준을 정했다. 소위 '북쪽', 즉 조선 총련계의 재일동포들 중에는 이 ‘핵심간부’나 ‘수괴급’에 해당할 만한 관계자나 그 친족·자손도 적지 않다. 4.3사건의 진상규명이나 명예회복 조치가 진전되고, 일본에서도 4.3사건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막으려는 압력은 상당히 해소되었지만, 4.3무장봉기를 ‘반역’으로 보는 시각이 공적인 논리나 기준으로서 지속되는 한 재일동포사회에서의 4.3을 둘러싼 침묵의 압력도 지속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실행위는 이렇듯 재일동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일본에서는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이라는 문제가 보다 절실한 과제로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희생자 인정’이나 ‘명예회복’이란 과제는, 결국 4.3사건의 ‘역사정립’이나 ‘정명’(항쟁, 폭동 등의 4.3사건의 명칭)의 문제에 귀착되기 때문에 제3세션과 제4세션에서는 그러한 관점에서 똑같이 과거사의 문제에 직면해 온 대만과 오키나와의 경험도 거론되면서, 보다 넓은 시야에서 제주 4.3의 진상규명운동의 성과와 과제가 논의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 문제와 4.3 정명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일본지역 4.3 희생자 신고자 수는 일본유족회가 결성되는 2000년부터 2003년 사이에 신고된 74명과 2013년 추가 신고된 1명을 합해 75명이 전부이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일본지역 희생자는 이미 제주도에 있는 친인척들이 모두 신고해 더 이상 없다. 아니면 총련측 자이니치들이 상부의 허가를 받지 못해 신고를 못 하고 있는 상태이다. 

▲ 둘째 날, 종합토론을 진행하고 있는 정아영 실행위원.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일본 연구자들이나 4.3을 생각하는 모임 관계자들은 거의 후자측 생각을 갖고 있다. 총련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희생자 신고를 하게 되면 일본측 희생자 신고수는 자연 늘어날 것이다. 종합토론에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기도 한 발제자 이재승 교수에게 질문이 돌아갔다. 헌재의 결정을 4.3위원회가 받아들여서 배제자를 결정했기 때문에 이번엔 역으로 4.3위원회가 헌재의 결정을 무시해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결정한다면 다른 문제가 없겠는지. 이재승은 다소 문제가 발생할 소지는 있지만 4.3위원회가 그렇게 결정한다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대답했다. 

사실 이 문제는 4.3정명 문제, 즉 성격 문제하고도 관계있음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때문에 70주년을 맞아 이제는 4.3 이름 짓기에 나서자고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만큼 4.3 관계자들은 정명 이전에 배제된 희생자 문제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모든 희생자의 명예회복 문제나 성격 규명 문제는 우리 4.3운동의 궁극적인 도달점 중의 하나이다. 이날 한 토론자는 한국에서 이런 문제 제기가 계속 지연되고 있는 요즘, 오히려 일본에서 한국에 더 강력하게 문제 제기를 하면 어떻겠는가 하고 역질문을 했다. 이 토론자는 아울러 총련 관련 다음의 문제도 일본측에 주문했다.  

“총련 문제는 일본 4.3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임과 동시에 희망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일본사회에서 어느 한 단체나 개인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한국의 남북정권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조동현 씨가 2003년 제55주년 도쿄 행사와 2004년 제56주기 오사카 행사 당시 총련과 민단을 끌어드리기 위해 했던 아래로부터의 노력, 총련 상부조직과는 단 한 번의 상의도 않고 단위 일군들의 개별적 양심에 호소해 행사에 끌어들였던 그 노력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결과 2003년에는 도쿄에서 총련 아라카와상공회 양모 이사장과 민단 아라카와 지단장을 행사 공동대표로 합류시키고, 2004년에는 오사카에서 총련 이쿠노 동·서·남·북지부의 지부장들이 공동명의로 참가하고 민단도 참여케 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 모습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일본지역 4.3운동은 질적으로 발전하리라 봅니다. 사실 토론자도 2003년에 도쿄조선중고급학교 문회회관에서 1000여 명의 중고생들과 함께 '놀이패 한라산'의 공연을 실제 감동적으로 관람한 기억이 있어 일본지역의 4.3운동가 여러분들께 힘들더라도 이 점 다시 한 번 노력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번의 일본 4.3심포지엄은 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때문인가, 많은 사람들이 세미나가 한 번으로 끝나지 말고 규모는 작더라도 해마다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끝) / 김창후 전 제주4.3연구소장

김창후(金昌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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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후 전 소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10년 2월~2014년 2월 : 제주4.3연구소 소장
2012년~2013년 : 제주4.3평화재단 이사
2012년~2013년 : 5.18기념재단 이사

주요 저서 및 논문

1989 : 《이제사 말햄수다 1》, 한울
1993 : 《1948년 4.3항쟁 - 봉기와 학살의 전모》, 역사비평사
1996 : <재일제주인의 항일운동>, 《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2000 : <넬슨 특별감찰보고서 : 제주도의 정치상황에 나나난 제주도지사 유해진>, 《제주도 연구》, 제17집
2008 : 《자유를 찾아서 - 金東日의 억새와 해바라기의 세월》, 선인
2010 : 《한라산에 해바라기를》, 新幹社(일본) 
(*《자유를 찾아서-金東日의 억새와 해바라기의 세월》의 일본어 번역판)
2010 : 《대마도를 떠도는 4.3넋 - 그 넋을 찾아 나선 순례자의 닷새》, 도서출판 각
2011 : <4․3사건과 제주교육>, 《근․현대 제주교육 100년사》, 제주도 교육청
2017 : 《4.3으로 만나는 자이니치》, 진인진 외 논문 및 조사보고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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