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제주 안에서만의 사건이 아니다. 특히 지금도 수 많은 제주인들이 4.3의 기억을 간직한 채 일본에서 지내고 있다. 4.3 7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3월 10일부터 11일까지 오사카에서 열린 ‘제주도4.3사건 7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이다. 일본에서 열린 첫 번째 4.3 관련 국제심포지엄이다. <제주의소리>는 심포지엄 토론자로 참석한 김창후 전 제주4.3연구소장의 후기를 두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단순 체험기 이상으로 4.3을 기억하는 일본의 흐름,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리라 본다. [편집자 주]

[일본 4.3 국제심포지엄] (1) 일본지역 4.3추도운동 3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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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 동안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주도4.3사건 7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엄, 국제사회와 제주4.3-일본에서 보는 시각' 현장 모습.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4.3추도의 시작

일본지역에서 4.3추도는 1985년 도쿄에서 '탐라연구회'가 창립되면서부터 시작됐다. 탐라연구회는 창립 후 김민주(이하 존칭 생략)를 중심으로 양성종, 안영식, 송창빈, 김병오가 모여 공부모임을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제일 어린 후배로 참여했던 고이삼(도서출판 <신간사> 대표. 자이니치 시민운동가·4.3운동가)은 당시 김민주가 했던 말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토로한다. 

“(자이니치) 제주인이 제주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모르고 공부를 하려해도 교과서가 없는 실정이라면, 우리 스스로 공부모임을 만들어 해결하자.” 

이어 1987년에는 '4.3을 생각하는 모임'이 회장 현광수, 사무국장 김민주를 중심으로 창립돼 일본지역 4.3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당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강창일, 김명식과 자이니치 제주인 2세로 문경수, 고이삼, 김중명, 이정미 등이 참여했다.

추도제사는 탐라연구회 창립 후, 김민주와 제주도의 조천초등학교 동기이며 조천중학원을 함께 다녔고, 같은 조직에서 활동했던 김동일(김병오의 고모. 2017년 사망)이 4월 3일이 되면 집에서 제물을 만들어 오는 형식으로 몇 번 치러졌다. 이러한 추도의례는 곧 4.3을 생각하는 모임의 창립과 1988년 첫 4.3추도회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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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에서 처음 열린 40주년 4.3추도행사 강연회 모습.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일본에서 처음으로 행해졌던 1988년의 4.3추도기념 첫 공개 행사는 도쿄의 YMCA에서 강연회 형식으로 치러졌다. 이날 행사는 3백~4백 명의 사람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당시 이 행사는 김석범, 현광수, 김민주 등 자이니치 제주인 1세들이 탐라연구회와 4.3을 생각하는 모임과 함께 주도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지역 4.3 40주년 추도회를 준비했던 고이삼은 도쿄와 오사카, 그리고 한국의 서울과 제주도에서 동시 4.3추도회가 열리도록 계획했었다. 그러나 당시 추도회가 행해진 곳은 서울(김명식 주도)과 도쿄 두 지역뿐이었다.   

초기 4.3운동의 어려움

1988년 첫 추도행사 후 일본지역 4.3행사는 곧 침체에 빠졌다. 4.3을 생각하는 모임도 문경수·고이삼 체제로 바뀌었다. 당시의 어려움을 알 수 있는 대화를 소개

고이삼: 제 기억으로…… 41주년은 행사를 못 했습니다. 42주년에는 100명 정도밖에 모이지 않아서 정말 쓸쓸한 행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사카에서 해야겠다 싶어서 사람들을 만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45주년(1993년)에 처음으로 오사카에서 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교수도 기억하겠지만, 41주년 총괄회의에서 김민주 선생님이 나하고 문교수를 따로 불렀잖아? 그리고 말씀했지. 지금까지 현광수와 자신이 행사를 맡아서 했다. 그러나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리고는 대표와 사무국장 자리를 그만두셨지. 그때 마침 문교수가 대학에도 나가고 하니 대표 자리를 맡으라고 하셨어. 저에게는 사무국장을 맡으라고 했고. 그렇게 저희 둘의 체제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문경수: 그것이 41주년인가?

고: 아마 41주년, 아니면 42주년 때일 거야. 그때 현광수 선생님이 경제적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자신이 전부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그건 말뿐이었고, 그걸 계기로 선생님은 운동에서 더 멀어지게 됐지.

김창후: 그게 1989년, 1990년?

고: 아마 1990년일 겁니다.

문: 1988년 행사 끝나고 바로 아니었던가?

고: 아니 한 1년 지나서였어.

문: 그럼 아마 1989년인 것 같은데…….

김: 확실히 기억 좀……?

문: 아마 1988년 모임 끝나고 바로였던 것 같은데?

고: 한 1년 지나서야. 41주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회의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문: 난 기억이 없어. 석범선생님이 쓴 책에 따르면 40주년 끝나고 곧 우리들이 후계자가 된 것처럼 되어 있어.

고: 아니 바로는 절대 아니야.

문: 그래. 그런데 난 그 당시 기억이 확실하지가 않아.

김: 그건 어떻든 고선배가 기억을 더듬어보면서 정리를 해주셔야 해요.

문: 결국 경제적인 지원 문제도 있고 해서 일시적으로 주춤하게 되었던 거지.

고: 하지만 우리가 그 분들 의견을 듣고, 그 분들이 원하는 대로 갔다면 도와주셨을 지도 몰라. 우리에게 자리를 넘겼으니 현광수 선생님이 의도하시는 대로 따라갔으면 좀 달라졌을지도 몰랐을 거야. 우리 멋대로 현기영 선생님의 책을 내고 했으니까.

김: 그럼 두 분 체제로 가게 된 건 1989년부터라고 정리할 게요. 그때 문선배가 대표고, 고선배가 사무국장인 거죠?

문: 응, 그렇게 하지. 1989년부터라고.
- 김창후의 《4.3으로 만나는 자이니치》가운데 일부.

이렇듯 일본지역 4.3운동 초기의 실상은 상세히 밝혀져 있지도 않고, 실제 운동도 어려웠다. 사실 1988년 이후 1998년 50주년 추도회까지 10년간은 일본 4.3운동의 침체기였다. 도쿄에서 추도회가 규모 있게 치르기 힘들어지자 고이삼은 오사카 위령제를 추진했다. 그래서 이루어진 행사가 1993년 오사카의 ‘제주도4.3 제45주년 기념행사’였다. 이 행사는 여러 비판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고이삼의 한학동 후배였던 장정봉이 주도해 이루어졌다. 

그 후 1998년 4.3 50주년을 맞으면서부터 도쿄에서는 조동현(현 ‘4.3을 생각하는 모임·도쿄’ 대표)이, 오사카에서는 오광현(현 재일본제주4.3유족회 회장)이 참여하면서 현재까지 일본지역 4.3행사를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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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45주년 4.3추도제의 행사 팸플릿.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일본지역 4.3운동의 주도자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4.3을 알게 된 계기가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통해서라면, 자이니치들은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1957)이 그 시발점이다. 특히 고이삼은 이 두 소설을 모두 언급하며 까마귀의 죽음이 처음 자신에게 4.3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면, 순이삼촌은 4.3으로 인한 1948년과 1949년의 도민봉기와 대량학살의 흐름 속에서 제주인들이 그 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해주었다고 했다. 

현재 일본에서 4.3운동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자이니치 2세들로는 문경수, 고이삼, 조동현, 오광현, 정아영, 장정봉들이 있다. 최근에는 이 외에 많은 자이니치들과 일본인들이 참여해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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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심포지엄의 제1세션 ‘일본에서의 4.3운동의 진전과 과제’에서 함께 자리한 4.3운동가들. 왼쪽부터 오광현, 조동현, 김창후, 고이삼.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문경수, 고이삼 등 일본의 자이니치 2세 4.3운동가들은 대학 시절 '한학동'(재일한국학생동맹의 약칭. 1950년 결성된 민단 산하조직. 1972년 한학동은 민단 산하단체에서 추방됨. 한문련은 한국문화연구회의 약칭으로 한학동의 지부에 해당됨)이나 '한문련', 아니면 '유학동'(재일본조선유학생동맹의 약칭. 총련 산하의 재일조선인 대학생 단체임)이나 '조문련'(조선문화연구회의 약칭)에서 활동을 하며 시민의식과 민족의식을 형성했다. 

이들 거의 모두는 한국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운동권’ 사람들이다. 우리는 70~80년대를 거치며 반독재·군사정부 타도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을 보통 운동권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이들 자이니치 2세 ‘일본 운동권’은 주로 70〜80년대 초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로, 학내에서 한학동이나 유학동 써클 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리고 이들은 80년대에 가서는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일본인들과 함께 벌이며 진정한 시민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문경수는 유학동, 고이삼, 오광현, 정아영, 장정봉은 한학동 출신이다.

오사카의 문경수는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했다. 4.3과 자이니치, 한국현대사에 대한 여러 저술을 갖고 있는 4.3운동가이며, 대표적 자이니치 지식인이다. 그는 자연스레 조선학교를 다니며 체득했던 민족의식과 일본대학 시절의 유학동 생활 경험으로 여러 저술서를 집필하며  4.3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광현은 오사카의 대표적 자이니치 시민운동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일본학교를 다녔으면서도 독특하게 민족의식을 갖게 되고 한국말을 익혔다. 그리고 1998년 제50주년 4.3행사를 오사카에서 준비하면서 처음 4.3운동에 참여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강력하게 주장해 ‘4.3위령굿’을 성공시켰다. 그는 현재 일본4.3유족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정아영은 주변에서 “운동은 잘 하지만 스포츠는 못 한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들을 정도로 자이니치 민족·인권운동에 열정을 다해온 시민운동가이다. 현재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경영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 부친 정경모는 저명한 한국 통일운동가이다.

장정봉은 1993년 고이삼의 권유로 어려움 속에서 거의 홀로 오사카의 4.3행사를 치렀던 시민운동가이다. 그는 당시 혼자 행사 리플릿을 붙이러 거리에 나가고, 행사의 사회를 보며 1인 10역을 했다. 그는 4.3을 생각할 때면 4.3 당시 일본으로 건너온 아버지를 아프게 기억한다. 아버지가 탄압 측에 섰던 경찰이었다는 사실, 돌아가실 때까지 4.3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들에 대해 지금도 큰 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번 행사에서 필자와 만났을 때, 아버지 임종 때 며칠 간 같이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그 후 자신의 부친에 대한 트라우마 해소에 많은 도음이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제 아버지 고향인 삼양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도쿄의 조동현은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에서 오래 기자생활을 했었다. 사직 후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하는데 4.3운동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비교적 늦은 1998년 50주년 행사부터 참여했다. 현재 '4.3을 생각하는 모임·도쿄'의 대표와 김석범의 매니저로 활동하며 4.3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출판사, 신간사를 경영하는 고이삼이 있다. 그는 실질적으로 일본에서 4.3운동을 시작하고, 지탱하고, 이어오고 있는 중심적 4.3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1998년 제50주년 4.3추도 행사 

일본에서 4.3추도행사가 본격적으로 재도약을 하게 된 것은 1998년 제50주년 오사카 4.3행사 이후부터였다. 이 오사카 행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과거의 일본지역 4.3운동을 반성케 하고, 향후의 진로를 제시했다.   

첫째, 오사카에는 자이니치 제주인들의 밀집거주지역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는 4.3을 겪은 1세대들을 중심으로 한 추도회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었다. 그간의 추도행사는 몇몇 시민운동가나 혹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행사였을 뿐이었다. 그나마 해마다 열리지 않았었고, 오사카에서는 1993년 4.3 제45주년이 되어서야 첫 위령제를 지냈다. 

1997년에 처음으로 4.3운동에 참여한 오광현은 오사카 지역에는 1세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한 ‘위령굿’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반대했다. 제주도에서 행해지는 굿, 특히 위령굿이 어떤 형태의 의례인지를 아무도 몰랐다. 오광현은 오사카에서도 반대의 벽에 부딪쳤고, 도쿄 회의에서는 김석범 등 어른들로부터도 질책의 소리를 들었다. 그가 초청하려는 제주도 심방이 엉터리가 아니냐며 돈만 낭비할 것이라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오광현이 초청하려던 제주도의 심방은 김윤수였다. 그는 제주도의 인간문화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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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오사카 위령제의 ‘위령굿’을 알리는 리플릿. 제1부로 김윤수 심방이 ‘굿’(제주도칠머리당굿보존회)을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어렵사리 이루어진 김윤수 심방의 위령굿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날 행사장에는 굿을 시작하기 대여섯 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은 주로 머리가 허연 1세 할머니들이었다. 그날 행사장을 가득 메운 5백여 명의 참여자들 중 절반 이상이 1세 어르신들이었다 한다. 
         
두 번째, 1998년 50주년 행사 이전에는 4.3추모제는 말 그대로 ‘제주인들만의 행사’로 인식됐다. 정아영은 자신이 일찍부터 4.3행사에 참여하고 싶어도 당시 분위기는 그럴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며 고이삼과는 선후배 사이로 한학동 활동을 같이한 아주 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정아영은 당시 4.3행사만은 자신의 참여를 암묵적으로 거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했다. 때문에 자신은 행사장 부근에도 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4.3 제50주년을 맞는 1997년부터였다. 1997년, 다음해의 행사를 준비하면서 오광현을 비롯한 정아영 등 많은 시민운동가나 지식인들이 4.3운동진영에 합류했다. 이 시기 많은 일본인들도 합류했다. 지금 후지나카 다케시, 사토 노리코, 다카무라 료헤이, 이지치 노리코, 무라카미 나오코 같은 일본인들은 중심적 4.3연구자이며, 4.3운동가이다.

세 번째, 1998년 제50주년 4.3행사 이후 도쿄와 오사카 양쪽에서는 서로 성격을 달리하며 해마다 4.3추도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4.3을 생각하는 모임·오사카'에서는 자이니치 제주인 1세들이 아직도 오사카에 많이 거주하는 사실을 감안하여 ‘위령제’ 형식으로, 도쿄의 행사는 김석범, 양석일, 최양일 등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기념제’ 형식으로 치르고 있다.  

4.3특별법 통과와 <재일본제주4.3유족회>의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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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유족회 결성을 보도한 2000.10.18. 아사히신문 기사 . 사진=김창후. ⓒ제주의소리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자 일본에서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한국에서 합법적인 4.3진상규명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희생자신고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일본4.3유족회 창립이 점차 거론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에서 4.3희생자 신고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4.3행사도 다양해졌다.       

'재일본제주4.3유족회'는 4.3특별법이 제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0년 10월, 오사카에서 창립됐다. 초대회장은 강실, 사무국장은 오광현이었다. (2009년에는 오광현이 유족회장직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유족회는 창립 후 오사카의 4.3을 생각하는 모임과 함께 4.3위령제를 주도하며 많은 활동을 했다. 또한 희생자신고도 유족회가 중심이 되어 접수하기 시작했다. 

오사카의 4.3위령제는 일본유족회가 창립된 후 오사카의 4.3을 생각하는 모임과 함께 치러나가게 되면서 행사 자체가 더 다양해지고, 대중화됐다. 50주년 행사 이후 모든 자이니치들과 일본인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됐지만 더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현재 이들은 행사 준비 단계에서부터 모임에 참여하고, 행사를 같이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본의 현실상 어렵기만 한 일은 희생자신고 접수이다. 일본의 4.3희생자 신고자는 지금도 강실 회장 초기에 신고를 받았던 74명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4.3특별법 제정 후 6차에 걸쳐 희생자신고를 받고 있는 상황인데 일본에서는 5차신고(2012.12.1.~2013.2.28.) 시기에 1명이 추가돼 지금도 75명이 신고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일본에서의 4.3희생자 신고수가 적은 것은 한국, 특히 제주도에서 이미 신고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총련’이라는 조직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련의 조직적인 협력이 없는 한 일본에서의 희생자신고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2008년 제60주년 제주도 4.3위령제에의 대규모 참여

2008년 제주도에서는 제60주년 4.3행사가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다. 당시 ‘4.3으로 떠난 땅, 4.3으로 되밟다’라는 구호 아래, 자이니치와 일본인 144명이 제주도에 초청돼 4.3평화공원을 찾아 참배하고 4.3행사에도 참여했다. 이 방문단에는 김석범, 강실, 조동현, 문경수, 고이삼 등 일본의 4.3운동가들 외에도 김민주(77), 김동일(77), 이복숙(73) 등의 4.3피해자인 자이니치 1세들도 있었고, 일본의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도 있었다. 그 중, 구호 그대로 4.3으로 일본에 도피했다 처음 고향을 되밟은 김동일은 NHK의 취재진들과 함께 평화공원을 찾고, 항일운동가인 부친의 묘지를 찾아 엎드려 절하며 가족들과 함께 꿈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이 행사는 그 후 일본 자이니치 사회의 4.3에 대한 인식 변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점차 일본지역 4.3행사에 자이니치들의 참여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고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또한 국적에 관계없이 젊은 4.3운동가를 양성하는 역할도 했다.    

올해 70주년 제주도 4.3위령제에도 일본지역에서 235명(도쿄 150명, 오사카 85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젊은 3~4세의 자이니치들이거나 일본인들이어서 앞으로 일본지역 4.3운동의 활성화에 거는 기대 또한 높아지고 있다. / 김창후 전 제주4.3연구소장

김창후(金昌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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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후 전 소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2010년 2월~2014년 2월 : 제주4.3연구소 소장
2012년~2013년 : 제주4.3평화재단 이사
2012년~2013년 : 5.18기념재단 이사

주요 저서 및 논문

1989 : 《이제사 말햄수다 1》, 한울
1993 : 《1948년 4.3항쟁 - 봉기와 학살의 전모》, 역사비평사
1996 : <재일제주인의 항일운동>, 《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2000 : <넬슨 특별감찰보고서 : 제주도의 정치상황에 나나난 제주도지사 유해진>, 《제주도 연구》, 제17집
2008 : 《자유를 찾아서 - 金東日의 억새와 해바라기의 세월》, 선인
2010 : 《한라산에 해바라기를》, 新幹社(일본) 
(*《자유를 찾아서-金東日의 억새와 해바라기의 세월》의 일본어 번역판)
2010 : 《대마도를 떠도는 4.3넋 - 그 넋을 찾아 나선 순례자의 닷새》, 도서출판 각
2011 : <4․3사건과 제주교육>, 《근․현대 제주교육 100년사》, 제주도 교육청
2017 : 《4.3으로 만나는 자이니치》, 진인진 외 논문 및 조사보고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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