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초부터 대한민국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는 단연 ‘미투(me too)’다. 미투 운동의 본질이자 핵심은 ‘권력’으로 인한 부당한 성폭력의 고발이다. 그렇기에 미투는 오랫동안 쌓여온 한국 사회의 적폐를 해소하는 동력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제주지역 동네책방들이 합심해 미투 운동에 동참하는 ‘위드유(with you)’ 프로젝트에 나섰다. 책방들은 저마다 페미니즘 책을 한 권씩을 도민들에게 추천한다. <제주의소리>는 위드유, 나아가 미투에 공감하며 동네책방의 추천도서를 소개한다. 서평은 책방지기들이 정성껏 작성했다. 소개 순서는 가나다 순이다. [편집자 주]

[책으로 만나는 with you] (2) 돈키호테북스 《이갈리아의 딸들》

▲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출판사. 사진=교보문고 홈페이지.

《이갈리아의 딸들》이 우리말로 처음 번역된 시기는 1996년이다. 나는 이 책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그러니까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에 읽었다. 노르웨이 작가의 이 책이 세상에 처음 나온 해는 1977년이고 올해는 2018년이다. 거의 20년 터울을 두고 첫 출간, 우리말 번역, 그리고 '#미투'와 '#위드유'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이다. 

1990년대 초반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자. 탤런트 김희애와 최수종이 이란성 쌍둥이로 열연한 MBC TV <아들과 딸>(1992~3)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없는 집에, 또 딸은 많지만 아들은 ‘없는’ 주인공 가정은 암탉이 갓 낳은 달걀 한 알부터 시작해서 대학교육까지 모든 기회가 외동아들에게만 주어졌다. 딸들은 불평할 수 없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부모의 기대 속에 압박을 느꼈으며, 어머니는 드디어 성공한 딸에게 그 동안의 모든 불공평한 처사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없던 시절, 동기 간에 콩 반쪽도 나눠먹으라는 가르침을 딸에게는 실천하지 않았으니 궁색한 변명이다. 하지만 이 변명의 장면에도 가르침은 있다. 부모가 아들에게 모든 자원을 우선 배분하는 이유는 법적, 제도적 성차별 때문에 딸보다는 아들이 부모를 봉양할 자원을 더 많이 갖기 때문이다. 취업의 문도 남자에게 넓고 동일 노동을 해도 남자가 더 많은 돈을 받는다. 혼인에 이르면 아들은 ‘며느리’라는 평생무임 노동자를 집안으로 데려오지만 딸은 십중팔구 다른 집에 평생무임 노동자로 가게 될 테니 굳이 딸에게 많은 자원을 배분할 이유가 없다. 

드라마에서는 딸·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어머니와 딸 사이의 갈등으로 축소한다. 딸과 어머니의 절규 속에서, 서로를 향한 용서 속에서 드라마는 훈훈하게 끝난다. 하지만 그 집의 많은 딸 중 어머니의 사과를 받은 딸은 ‘성공한’ 딸 하나뿐이다. 그리고 도대체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가?

20년쯤 전에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며 무릎을 치고 감탄했다. ‘사람’이 ‘여자’를 뜻하는 세상에서 ‘남자 사람’들은 자지 싸개를 차고 가슴에 난 털을 부끄러워한다. 집안일과 육아를 담당한 아버지는 괄괄한 딸이 연약한 아들을 못살게 굴지 못하도록 말려야 하고, 부끄러움 많은 아들에게 가슴에 난 털을 밀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여성과 남성의 처지가 역전된 미러링(mirroring, 거울에 비쳐 봄)이 이갈리아의 세계관이다. 시시하고 진부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역지사지는 뜻밖의 통찰을 제공한다.

그녀는 페트로니우스에게 자주 경고를 했다. 너무 싸돌아다니지 말고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자마자 크리스토퍼가 끼어들어서 그 애를 감쌌다. “여보, 이제 그 애를 내버려둬요.” 크리스토퍼는 그녀가 아이들을 공평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는 오히려 몸무게가 너무 많이 나가요. 사실 너무 뚱뚱하다구요. 그런데도 그 애한테는 왜 살 좀 빼라고 잔소리하지 않죠?”

“움은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어. 움은 임신을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움은 뚱뚱해지기도 하고 날씬해지기도 하지. 움에게 이상적인 체형을 정한다는 것은 우스운 거야.” - 《이갈리아의 딸들》 51쪽.

어머니는 아들이 나돌아다니는 게 걱정이다. 오동통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을 받는 세상에서 아들이 마른 것도 걱정이다. 여자의 선택과 보호를 받지 못하면 남자의 삶의 고달프고 노총각은 불명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은 뚱뚱하든 날씬하든 걱정하지 않는다. 여자는 임신과 함께 체형이 달라지기 때문에 뚱뚱하든 날씬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아, 정말 훌륭한 논리가 아닌가!

20년 전에 무릎을 치며 읽었다면 지금은 한숨을 쉬며 읽는다. 왜 이갈리아의 이야기가 아직도 나에게 울림을 주는가? 지난 20년간 무슨 일이 있었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세상에 나온지 40년이나 된 이야기가 어째서 아직도 촌스러운 구닥다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읽히는 걸까? 

책 서두에 실린 이갈리아 용어 사전에 의하면 ‘이갈리아’라는 나라의 이름은 평등주의(egalitarian)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나라 이름은 평등을 말하지만 현실은 평등과 거리가 멀다. 

“있잖아, 나 역사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어. 잘했지?”

“으으으으음…….”

“이봐.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 난 왜 항상 역사는 움들에 대해서만 말할까 궁금해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건 움들이 아주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그 다음에는 내가 아주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 《이갈리아의 딸들》 209쪽.

▲ 김보경 돈키호테북스 대표. 사진=돈키호테북스. ⓒ제주의소리
역사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남자 아이는 형에게 시험을 잘 봤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역사는 어째서 여자들에 대해서만 얘기할까? 남자 아이는 곧 남자인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존재, 하찮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어 씁쓸하다. 남자 아이가 이런 느낌을 알다니!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겠다. 그러니까 2018년 현재,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미투 운동은 그동안 널리 퍼져 있었으나 은폐되었던 범죄에 대한 고발이다. 성폭력(성희롱, 강제추행, 성폭행) 범죄가 은폐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길래 누군가는 타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를 지속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가? 이갈리아의 미러링은 아직도 유효하다. / 김보경 돈키호테북스 대표

돈키호테북스가 추천하는 #미투 #위드유 지지 도서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랩걸》, 호프 자런, 알마.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동녘.

《안 부르고 혼자 고침》, 완주숙녀회·이보현 지음, 자기만의 방.

《나에 관한 연구》, 안나 회룬굴드, 우리학교.

《나의 첫 젠더 수업》, 김고연주, 창비.

돈키호테북스는?

나는 2016년 12월 15일에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로 이주했다. 탈수도권 또는 인생전환을 꿈꾸며 친구 일곱 명이 2년간 같이 독서 모임을 했는데, 그 중 언니 한 명과 내가 제일 먼저 제주도로 같이 이주하게 됐다. 2017년 초에 연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건물을 소개 받아서 책방을 열겠다 생각하고 제주의 독립책방 순례를 시작했다. 북타임, 라바북스, 유람위드북스, 라이킷까지 돌았을 때 연세를 내지 않고 가게를 할 수 있으리라 했던 건물의 주인이 바뀌었다. 구두약속이었고, 세를 내지 않는 가게라는 것이 서울 촌사람에게는 워낙 SF적 설정이라 큰 충격은 없었다. 빈집 활용 목적으로 제안 받았던 가게가 없어지면서 퇴직금을 앉아서 까먹느니 직장을 만들자는 목적으로 가게 자리를 찾아다녔다. 다만 가게세를 내면서 운영이 쉽지 않을 테니 음식을 파는 가게로 종목을 변경하기로 했다. 함께 이주한 언니가 주방을 맡고 나는 음료와 서빙을 맡기로 했다. 4월에 가게자리를 계약하고 8월에 ‘돈키호테 샌드위치 앤 하몽’이라는 음식점을 개업했다. 음식점 안에 책방을 두기로 하고 9월 6일에 돈키호테북스의 사업자등록을 냈다. 

돈키호테북스는 친구들과 함께했던 독서 모임의 주제인 인생전환을 큐레이션의 주제로 삼고 있다. 서울, 경기권에서 살고 일하며 많이 이동하고 많이 소비하고 타인뿐 아니라 자기자신도 착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방식을 바꾸고 싶었다. 조금 더 자연에 가까운 삶의 방식이었으면 했고, 지구의 부조리한 기아와 가난에 저항하고 싶었다. 샌드위치 가게 안의 아주 작은 책방 돈키호테북스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서귀포시 호근남로 37 돈키호테샌드위치앤하몽 內 (한성빌라)
인스타그램 @don_quixote_sandwich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