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비행장은 태평양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들어졌다. 강제동원에 따른 도민들 피와 땀의 산물이었다. 4.3의 광풍 속에서 수백명이 총살돼 암매장되는 아픔도 겪었다. 한·일 항공협정 체결후 제주~오사카 항로가 신설되면서 1968년 제주비행장은 제주국제공항으로 승격된다. 늘어나는 관광객에 현재는 동남아를 연계하는 명실상부한 국내 관광허브 공항으로 성장했다. 올해로 국제공항 승격 50년을 맞는 제주국제공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주]
[창간14주년 기획-되돌아 본 제주국제공항 50년] ① 지정학적 요충지 비행장 태동...1968년 대통령령 국제공항 승격
변화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시작됐다. 제주도 반경 1000km 이내에 서울과 중국 상하이, 일본 오사카, 대만 북부지역이 위치하면서 동아시아의 중심지로 부각됐다.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하기 위해 군용비행장 건설을 호시탐탐 노렸다. 제주의 첫 비행장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지역의 알뜨르비행장이었다.
당시 일본은 1926년부터 1930년까지 대정과 한림, 중문지역 주민들을 동원해 60여만㎡ 부지에 길이 200m의 활주로를 만들었다. 1937년에는 비행장 규모를 250만㎡로 늘렸다.
일본은 중국 본토 침공을 위해 제주시 지역에 추가 공항 건설을 추진했다. 이 계획에 따라 1942년 1월 현 제주공항 부지에 제주비행장(정뜨르비행장)이 처음 들어섰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제주를 최후의 보루로 정하고 요새화에 나섰다. 알뜨르와 정뜨르에 이어 조천읍 진드르에 추가 비행장 건설을 추진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946년 패망한 일본이 떠나면서 제주비행장에는 드넓은 잔디밭과 석조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 항공기 이착륙을 위한 비행장 기능도 상실했다. 1955년까지 그대로 방치돼 왔다.
그 사이 국내에서 이념논쟁이 불거지며 1947년 제주4.3 사건이 발발했다. 이듬해 말 군경은 억울하게 끌려온 주민들을 이곳으로 데려가 총살후 암매장했다.
1949년부터는 진압군이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 선고를 내린 주민 249명을 총살하기도 했다. 제주에서는 예비검속 집단 학살을 포함해 800여명이 이곳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통부는 자금을 수혈해 현 제주공항 부지에 길이 500m, 폭 25m의 아스팔트 활주로를 처음 건설했다. 4.3유해는 그렇게 차디찬 아스팔트 밑에서 수십년간 봉인돼 왔다.
당시 대합실에는 나무의자 3~4개가 놓여있을 정도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교통부는 항공기 이착륙이 어렵자 활주로를 1000m로 갑절 늘렸다. 1961년에는 길이 1500m, 폭 35m로 넓혔다.
1962년 교통부 산하에 국내 첫 국영항공사인 대한항공공사(현 대한항공)가 설립되면서 제주비행장에서도 항공기 취항업무가 이뤄졌다. 1966년에는 항공보안 시설까지 만들어졌다.
승객들은 대한항공공사 제주지점에서 항공권을 구입하고 전세버스를 탄후 공항으로 이동했다. 좌석배정도 없어서 승객들이 우르르 항공기 내부로 달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정부는 변화무쌍한 제주 바람으로 항공기 이착륙이 어려움을 겪자 1973년 당시 6억원을 투입해 길이 2000m, 너비 45m의 남북교차 활주로를 추가로 건설했다.
1970년대 제주가 관광명소로 각광받게 되자 정부는 1978년 558억원 규모의 제주공항 확장 계획을 발표하고 1983년까지 활주로 확충과 여객청사 신축공사를 마무리했다.
제주공항은 보잉 747점보급 항공기 8대를 동시 계류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면서 연간 항공기 이·착륙 6만회와 여객처리 능력 260만명, 화물처리 규모는 7만t으로 끌어 올렸다.
정부는 1985년 제주공항의 관리운영 업무를 국토부에서 공기업인 국제공항관리공단(현 한국공항공사)에 넘겼다. 공단은 김포와 김해에 이어 제주까지 국내 3대 공항의 운영권을 확보했다.
1988년에는 88서울올림픽 성화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주공항에 도착해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91년 당시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제주공항을 방문하면서 또한번 이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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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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