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27) 골목길 에세이 / 성국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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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미

허기진 새벽 보다 은유가 더 고픈 시간
신발 신고 읽어보는 골목길 이야기 하나
찢어진 어느 갈피엔 젖은 꽃잎 말라간다
 
남편 입 안 가득 밴 실직의 알싸한 맛
달달한 꿀물 한 잔, 마른 길을 적셔놓고
섬 하나 통째 우려내 세상 속도 푸는 그녀
 
좁은 길 배불리는 하루해를 불러와서
헛헛한 어깨들의 무표정을 밝힐 때면
촉 세운 바람의 행간, 해피엔딩 갈무린다

- 성국희, <골목길 에세이> 전문-

골목의 이미지들이 중첩된다. 드라마 속 80년대 후반의 골목과, 90년대 서울 생활에서의 골목과,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제주시 중앙로 뒤편 술집들이 늘어서 있던 골목과, 성국희의 골목과...

시간을 역행할수록 좀 더 화기애애하고 활기가 넘쳤고, 따뜻함이 감돈다. 혼자였던 서울골목의 그 쓸쓸함보다 더 추워 보이는 성국희의 골목이다. 쓸쓸하고, 아프고, 외롭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모습이 보여 한편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안심은 결코 안전하지가 않은 것이니...'찢어진 갈피'가 있고, '실직의' 남편이 있고, '헛헛한 어깨들의 무표정'이 있는 골목이다. 그러나 작가는 애써 '젖은 꽃잎'을 말리고, 꿀물 한 잔과 속풀이 해장국을 우려낸다. 그래서 바람의 행간에 촉을 세워 해피엔딩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는 게 다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몽땅 행복하고, 몽땅 불행한, 어느 한편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행복과 불행이 적당히 섞인 것 그게 진정 사는 맛인 것이다.

골목은 나와 타인의 거리감 중 가장 근접한 거리에 있는 공간이다. 때문에 나의 행동과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다른 사람의 그것을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골목이다. 골목이란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타인을 알고, 이해하려는 여지가 그만큼 사라진다는 의미일 터, 시인들이 골목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휴머니즘에 입각한 글쓰기의 기초가 되는 시, 그 휴머니즘의 가장 작은 모세혈관, 골목길 에세이가 해피엔딩이 되기를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80년대 후반, 중앙로 성안다방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들면 멍석이란 이름의 소주집이 있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생맥주집과, 민속주점이 연이어 가난한 학생들을 반기던 우리들의 뒷골목. 암울했던 시대를 담벼락에 토해내던 젊은 치기들을 묵묵히 받아내 주던 그 골목이 문득 그리워진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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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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