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55) 허명의 문서

* 허멩 : 허명(許溟)이라는 사람, 조선 후기 무관
* 문세 : 문서(文書)
  
속담 속의 ‘허멩’은 조선 후기 무관이었던 사람 허명인데, 얼마 전까지도 대단히 잘못 알고 있었음을 실토해야겠다. 제대로 사람 이름으로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내 얕은 앎이 허명(虛名)으로 왜곡하고 있었다. 실속 없거나 사실 이상으로 알려진 명성, 그러니까 ‘공명(空名)’, ‘부명(浮名)’, ‘허문(虛聞)’, ‘허성(虛聲)’으로까지 간 것. 결국 허명무실(虛名無實), 유명무실(有名無實)로 가 버린 셈이다.

늘 말하면서도 '헛된 이름뿐 실상이 없다'로 풀이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허명은 虛名이 아닌, 제주 목사를 지낸 허명(許溟)이었다. 자신의 지식이 얕음에 몇 번인가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이 속담엔 유래가 있다.

제주 목사였던 허명이 재임 시에 채무로 말미암은 ‘주민 사이의 알력을 진정시킬 요량에서 작성된 문서’라는 데서 나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문서는 법적으로 보장돼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역 주민 간의 사적 감정을 해소시킬 목적에서  만들어진 임시방편일 뿐으로, 사실은 있으나 마나 한, 실효성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항간에서는 효력이 없는 증서 따위를 ‘허멩이 문서’라 말한다. 그러니 법적 효력이 없다. 한마디로 쓸데없는 문서를 빗댐이다.

공 들여 하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가슴 치며 탄식조로 흔히 하던 말이 떠오른다.

“밤이여 낮이여 탁 애썬 허단 보난 그 작산 일더리 다 허멩이 문세가 되어부러쩬 말이라. 명청 하늘님도 무정도허주, 이 일을 어떵허민 조코게.” 
(밤낮 애써 하다 보니 그 많은 일들이 다 허명의 문서가 됐단 말이라. 명청하신 하느님도 무정도 하지,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을꼬.)

허명(許溟)이란 인물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겠다. 제주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허멩이 문세를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허명은 무과 급제해 광양현감과 황해도‧함경북도 절도사를 지낸 뒤 삼도절도사에 오르고 다시 병마절도를 거쳤는데. 중간에 제주목사(1814. 순조 14)를 지낸 인물이다.

행적이 있다.

광양현감 시절(1795. 정조19), 호남 암행어사 신진현의 복명(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함)에 의하면. 다음같이 기록돼 있다.

“광양 현감 허명은 사람이 본디 사리에 분명하고 정사 또한 부지런합니다. 공무를 봉행하는 도리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 흠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진정(賑政: 흉년을 당해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의 경우는 가을부터 준비해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가솔을 데려오지 않고 아료(衙料: 관사 운영비)를 끊었으며, 또 자기 집에서 가져온 돈으로 자비곡(自備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곡식)의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구휼미, 救恤米)을 나눌 때는 기준에 맞게 했고, 장과 죽을 풍족하게 했습니다. 유리걸식(流離乞食: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걸함)하는 이들을 머물게 하는 장소 또한 모두 직접 살펴서 더욱 후하게 하도록 힘썼으며, 하는 일마다 정성을 다함이 지극히 가상합니다. 다만, 성품이 유약하고 솜씨가 아직 서툶으로 앞으로 점차 익숙해지면 공훈을 이룰 것이고, 더욱 힘써야 할 것은 너무 가혹한 점을 고치는 것입니다.”

청백리의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다. 제주목사 재임 시 행적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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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사를 청렴하게 봉행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과 가난한 주민을 긍휼(矜恤)히 여긴 제주 목사 허명의 위민정신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위정자들의 귀감이 되고 남을 일이다. 국민권익위원회 산하 청렴연수원은 충청북도 청주시에 위치해 있다.
  
허명은 해녀들이 미역을 캐는 데 따른 수세(水稅)를 없애고, 돈 900냥을 마련해 공용에 보태 쓰도록 했다.

또한 화재가 발생해 인명과 재산 등 많은 피해가 있었는데, 이를 조정에 보고해 감세와 지원을 받았다.

제주목사 재임이 1년 1개월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청렴한 행정을 베풂으로써 주민들이 우러렀다 한다. (병으로 이임했다.)

제주도민이 허명의 덕을 기려 ‘허면휼민청정비(許溟恤民淸政碑)’를 제주시 도남동 707-1 번지에 건립했다.

정사를 청렴하게 봉행한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과 가난한 주민을 긍휼(矜恤)히 여긴 제주 목사 허명의 위민정신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위정자들의 귀감이 되고 남을 일이다. 허멩이 문세란 말을 함부로 써선 안된다. 허명의 높은 덕을 가슴에 되새겨야 하는 말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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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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