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평화봉사단(단장 강상철)이 지난 달 ‘2017 국제개발협력사업’ 일환으로 아프리카의 진주 우간다(Uganda)에서 ‘평화의 씨앗 나누기’ 봉사활동을 벌였다. 지난 8월 20일부터 8월 30일까지 10박 11일에 걸쳐 쿠미(Kumi) 은예로(Nyero) 지역에서 12명 단원이 ‘쿠미와 제주, 하나 되는 평화 캠프’라는 주제로 활동했다. 제주특별자치도 평화대외협력과 주최, 제주평화봉사단 주관으로 이루어진 이번 사업은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t, ODA) 사업의 일환으로 전쟁과 재난․재해 발생국가, 저개발국가를 대상으로 제주 평화의 섬 이미지를 제고하고 지구촌 평화 증진을 위한 실천사업이다. 우간다 쿠미에 ODA 사업을 통해 새 희망을 심고 평화 증진 활동에 함께 참여한 양영길 시인의 글을 10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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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게로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티없이 해맑고 수줍은 미소가 인상적이다. 양영길 시인(사진 앞줄 왼쪽 첫번째)이 어린이들과 함께 밝게 웃고 있다. 사진제공 = 양영길 시인 ⓒ제주의소리

[양영길 시인의 우간다 이야기](2) 아프리카 우간다 쿠미의 아이들

아프리카의 푸른 심장이라는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도착한 단원들은 이제야 아프리카 땅을 밟는 기분이었다. 현지시간 오후 3시. 한국 시간으로는 오전 9시. 제주 출발 기준으로 보면 무려 27시간 만에 아프리카의 흙을 밟은 것이었다. 두바이에서 눈으로만 보던 땅을 직접 밟아보고 주변을 둘러본 첫 느낌은 메마른 땅이 아니었다. 푸른 녹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프리카의 스위스라 불리는 캄팔라로 가는 동안에도 녹지는 끝이 없었다. 수도 캄팔라 근처부터는 언덕과 구릉에 고급 주택들이 별장처럼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캄팔라에 감탄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야할 봉사활동 지역인 쿠미는 7시간의 밤길을 더 버스로 달려야 했다. 

호텔에서의 잠은 7시간 이동하는 버스에서의 잠보다 훨씬 달콤했다, 아주 소박한 숙소였지만. 침대 위에 모기장이 둥그런 차양처럼 매달려 묶여 있어 펼치고 잤다. 서늘해서 밤에는 이불을 끌어당겨야 했다. 오전 9시 기상인데 8시에 깨어 호텔 주변을 둘러보고 1시간이 지나서 아침식사를 했다. 현지 시간 8월 22일 오전 10시, 한국 시간 오후 4시였다. 호텔 아침 식사는 식빵, 감자, 달걀, 우유, 주스, 바나나였다. 아주 소박한 식사였는데 특이한 맛이나 향기가 없어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달걀껍질을 벗기고 한 입 먹었는데 노른자가 노랗지 않고 노란 흔적만 겨우 있어 우리 단원들은 먹다말고 모두 호기심 어린 한 마디씩 하면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짐들을 정리해야 했다. 공동 짐을 포장할 때, 같은 종류를 한 군데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박스마다 조금씩 나누어 포장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어느 나라에서 박스별로 한 종류의 물품으로 채워놓았다가, 세관 통관과정에서 장사하러가는 상품으로 오인 받아 곤욕을 치르며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슬픈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공동 짐을 풀어 놓고 보니 꽤 많은 짐을 가지고 왔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할 오카리나, 위생교육 때 사용할 치아 모형과 칫솔 치약 세트, 교실 환경 가꾸기 재료인 색종이와 융판, 심폐소생술 교육을 위한 CPR소품 등 20kg 박스가 15개가 넘는 물량이었다. 

우리 단원들은 봉사활동 이전에 아프리카를 알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베이스캠프로 가기 전에 읍내 거리와 장터를 찾았다. 7년 전에 우간다에 왔다는 현지 팀장 조이의 아이디어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나무 사이로 보이는 초가집들과 노란 물통을 들고 가는 아이들, 네 명이나 타고 있는 오토바이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모습들이었다. 길을 걷거나 밭일을 하던 사람,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 모두 우리 일행이 탄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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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간다 쿠미의 장터 모습. 숯 노점 뒤로 가게들이 즐비하다. / 사진제공 = 양영길 시인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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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간다 쿠미의 거리에 숯을 파는 노점들이 빽빽하게 장사진을 치고 있다. / 사진제공 = 양영길 시인 ⓒ제주의소리

조이의 안내로 읍내 중심가에 이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풍경은 길바닥 장터였는데 숯을 파는 장터가 활황을 이루고 있었다. 숯장사 옆으로 트럭에 싣고 내리는 것들도 모두 숯이었다. 그리고 파라솔로 햇빛을 가린 먹거리 노점과 옷을 파는 장터들도 보였다. 상설시장으로 들어갔더니 없는 것이 없었다. 쌀을 비롯한 각종 곡류와 채소류 과일류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추운지방에서 나는 밀가루 종류만 없는 것 같았다. 경작 가능 면적이 국토의 1/3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간다 농산물로 현재 동아프리카 인구의 2배에 달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데, 다소의 농업 현대화와 도로, 물류 여건의 개선만으로도 아프리카 빈곤문제가 풀릴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과 희망을 보았다. 

"에야라마 노이~"(대단히 감사합니다)하며 손 흔드는 아이들의 얼굴은 유난히 밝고 순수했다 

베이스캠프에 진을 치자마자 오후 들어 우리 단원들은 붉은 흙길을 달려 오카리나 교육활동을 펼칠 은게로초등학교(NGERO PRI. SCHOOL)를 찾았는데, 학교 교문 담벼락에 그려진 태극기가 우리 단원들을 반갑게 맞았다. 아이들은 "에야라마 노이"(대단히 감사합니다)하며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유난히 밝고 순수했다. 

학교 전경을 둘러보았는데 교실 외벽의 지도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동아프리카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Physical Features in E.Africa), ‘아프리카 근해 해류 흐름도’(Climatic Regions in Africa), ‘우간다 종족의 이동 경로’(Map of Uganda Showing Ethnic Groups) 등을 그려 놓고 있었다. 이런 지도는 우간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꼭 알아야 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34종족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안고 가야할 문제이기 때문일까. 실제로 지도에 나타난 바간다족이 최대 부족이며, 다음으로 바냐콜족, 바소가족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소수 부족인 마사이족으로 알려져 있는 까라무종 부족은 북동부에 살고 있는 것이 잘 표시되어 있다. 

쿠미에 사는 이테소(ITESO) 부족은 인구수가 다섯 번째로 많은 종족이다. 이동 확산 경로가 유난히 크게 강조되고 있다. 홈스테이를 했던 옹고디아 조지(Ongodia Jeorge, 62)에게서 실제로 이테소족은 에티오피아에서 1800년대에 난을 피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들은 테소어(이테소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지도에는 빅토리아 호수 외에도 알버트호수와 교고호수 등 큰 호수와 강을 그려놓고 있었다. 우간다는 17%가 강과 호수여서 수도관만 있으면 물은 어려운 나라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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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게로초등학교 교실 외벽에 그려진 각종 지도들 / 사진제공 = 양영길 시인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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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간다 쿠미의 은게로초등학교 정문 담벼락에 우간다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나란히 그려져 있다. / 사진제공 = 양영길 시인 ⓒ제주의소리

교실 내부를 살펴보았다. 교실은 대단히 열악했다. 교실 앞 쪽에 칠판와 교탁, 그리고 학생 2인용 목재 책상과 걸상이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운동장 쪽으로는 창문이 있었으나 창문 쪽 처마가 많이 길어 교실은 많이 어두운 편이었다. 왼쪽 벽면에는 찢어지다 남은 교육 자료가 단출하게 매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창문에 매달려 교실에 있는 우리들을 호기심 어린 큰 눈으로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운동장 나무그늘 교실로 왔더니 아이들은 박수와 율동을 겸한 노래를 불러 주었다. 우리  봉사단을 태운 버스가 출발해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노래했다. 합창소리의 울림이 맑고 고왔고 베이스캠프까지 노랫소리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 은게로초등학교를 오가는 길에서도 아이들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멀리서부터 달려와 손을 흔들기도 하고 밭일을 하다가 달려 나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시(詩)

손 흔드는 아이들   / 양영길

아프리카 우간다 쿠미의 아이들은
자동차 소리만 나면 
멀리서부터 달려 나와 손을 흔들었다.

골목길에서 달려오기도 하고
밭일을 하다가 허리를 펴고 달려오기도 했다.
한 손에 옥수수를 들고 있는 아이도 있고 
감자나 카사바를 들고 있는 아이도 있고
손 흔드느라 배꼽을 다 보여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일하는 아이들이거나
달려오는 아이들이거나
바나나를 쥐고 있는 아이이거나
손 흔드는 아이들은 
맨발이었다.

밭일을 한다는 것이
학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을까.
신발은 밭 가장자리에 벗어놓고
맨발로 일하는 
학교 등교 대신 일하던 아이들은 
더 간절히 손을 흔들었다. 

우간다 쿠미의 아이들은 
오늘도 손을 흔든다.
세계를 향해 내일을 향해 
80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인도양 
그 넓은 바다를 향해서도 
내륙국 우간다 아이들은 손을 흔든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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