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23) 겉보리를 껍질째 먹는다 한들, 시앗이야 한 집에 살랴
  
*살찻보리: 겉보리, 맥주맥의 제주방언. 동부 지역에선 ‘주넹이보리’라고도 함(주넹이;지네)
*거죽차: 껍질째 겨 그대로
*씨앗: 첩(妾)—시앗;남편의 첩(표준어). 제주방언에선 경음으로 소리 냄 

비록 겉보리를 (도정 않고, 또는 빻지 않고) 껍질째 먹는다 할지언정, 시앗하고는 한 집에서 살 수 없다. 아무리 생고생을 하고 산다 하더라도, 남편의 첩과 한 지붕 밑에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비유다.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속담이 있다. 남편이 첩을 얻으면 아무리 점잖고 무던한 부인네라도 시기를 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옛 왕조 시절, 엄한 궁중 법도로 비록 왕비라 할지라도 임금의 여인인 상궁 나인을 시샘해선 안된다고 했지만, 글쎄다. 인현왕후 민비와 장희빈의 미묘한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고도 남는 일이다. 민비가 폐비돼 여염집에서 보낸 통한(痛恨)의 세월을 우리는 안다. 시앗을 관대히 거두어 한 집에 품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무슨 일에든 예외란 게 있어 자못 흥미로운 게 인간사다.
  
어릴 때 동네에 조강지처와 첩이 한 집에 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남편이 두 여인을 한 집에 거느리고 산 것이다. 하도 못 살던 시절이라 끼를 굶는 구차한 형편인 걸 뻔히 알면서 그냥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차라리 한 집에 합치는 방편을 택했을지 모른다. 함께 나다니는 걸 꺼려하면서도 첩이 ‘성, 성(님)’하면서 잘 따르니, 본처도 ‘아시, 동승’ 하며 정을 주어 도탑게 지낸다고 했다. 철 분수 모를 적에도 별나게 보였던 기억이다. 어려운 일을 화해로 풀어나간 인간적인 정리(情理)가 각별한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매우 드문 예다.

시야를 넓혀 보면, 처첩(妻妾)이 한 집에 사는 정도는 약과로 아무것도 아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하지 않는가. 

병법서인 손무(孫武)가 쓴 『손자』에 나온 말이다. 예로부터 사이가 나쁜 오(吳) 나라 사람과 월(越) 나라 사람이 한 배를 타고 ‘오월동주’ 강을 건넌다고 치자. 강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홀연히 강풍이 불어 닥쳐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필경에, 그들은 평소의 적개심을 일단 접고 서로 왼손과 오른손이 돼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오월동주란, 사이가 나쁜 사람이 한자리에 있거나,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끼리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서로 똘똘 뭉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서로 반목하면서도 같은  이해관계에 대해 협력하게 된다는 빗댐이다.
  
‘원수는 순(順)으로 풀라’고 했다. 원한은 화평으로 풀어야 우환이 없다는 말이다. 또 ‘밤 잔 원수 없다’고도 한다. 남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도 때가 지나면 점차 덜해지고 잊힌다는 뜻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사 문제가 꼬이는 양상이다. 검증을 소홀히 하면 백 번 불거지는 폐단이다. 그렇다고 열흘 뒤 외교부 장관 없이 한미정상회담에 대통령 혼자 갈 수는 없다. 미묘한 정황이다.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학위논문 표절, 자녀 증여세 체납 등의 의혹으로 국회의 인사 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는데도, 공정거래위원장에 이어 두 번째로 임명을 강행했다. 야 3당이 국민·국회를 무시한 폭거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정국이 급랭하면서 향후 협치가 난항에 부딪칠 것이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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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일자리 추경 예산 편성 협력을 당부하며 취임 후 첫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딜레마다. 얽힌 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될까. 일단, 나라가 어렵다. 특히 외교 안보.

아무래도 ‘오월동주’를 꺼내 들 수밖에 없을 듯하다. 급히 먹은 밥이 체한다고, 이번 정권은 출발부터 여유롭지 못했다. 급히 판을 짜야 할 형편인 건 공인된 일. 그렇다면 여야 대치 국면으로만 갈 건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사안에 따라선 대승적 차원에서 풀어야 할 것이다. 

결국 나라가 잘되고 국민이 잘 살게 하고자 하는 일이다. 여와 야가 오와 월과 같은 적대관계는 아니다. 어차피 풀어야 할 국가과제인 바에 풀 만큼 풀어 놓고 봐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이게 순리다’ 하기가 참 난감하다. 

앞에 산이 놓였다. 험산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이 대목에서 대통령과 여권이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 있다. 과거의 실패를 기억해야 하는 일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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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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