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1) 갈치가 갈치 꼬리 끊어 먹는다고 한다
  
벗과 사귐에 신의를 저버리지 말라 경계하는 말이다. 같은 붙이이면서 갈치가 갈치 꼬리를 끊어 먹는다 했으니, 이게 될 말인가. 

하긴 세상에 눈을 돌리면 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퍽 하면 의리를 내세우지만 말 같지 않으니 가슴을 쓸어내린다.
  
문득 떠오르거니, 예전 고등국어 〈두시언해, 杜詩諺解〉에 나오던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사귐, 곧 영원히 변치 않은 두터운 우정을 뜻하는 사자성어다. 

유래담이 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관중과 포숙이라는 두 인물이 있었다. 전장에서 소백에게 화살을 쏘아 죽이려 한 관중이 사형집행을 목전에 두었을 때, 포숙이 나서서 왕인 소백에게 간원을 올린다.

“전하, 전하께서 제나라에 만족하신다면 신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신다면 관중 외에는 인물이 없을 것이옵니다. 관중은 자신이 모시는 분을 위해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시고 그를 전하의 사람으로 만드십시오. 관중의 지혜와 용기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포숙의 진언에 백관(百官)이 어리둥절했음은 말할 것이 없다. 임금을 죽이려 했던 자에게 오히려 벼슬을 내리라니,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지만 관중을 위한 포숙의 간청은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포숙에 대한 신뢰와 두 사람의 우정을 인정한 임금(소백)은 자신을 죽이려던 관중에게 재상의 높은 벼슬을 내렸다.

이후, 명재상 관중의 보좌를 받은 소백은 제 환공에 올라 춘추5패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관중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일찍이 내가 가난한 시절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나는 내 몫을 더 크게 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다.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 말하지 않았다. 세상 흐름에 따라 이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번번이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 말하지 않았다. 내가 시대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터에 나가 세 번 모두 패하고 도망쳤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 비웃지 않았다. 내게 늙으신 어머니가 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중이 포숙과의 사이를 회고하며 한 유명한 말이 있다.

“生我者 父母 知我者 鮑叔兒也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이는 포숙이다.)”

관포지교는 진정한 우정을 떠올릴 때 으레 인류에 회자되는 상징적인 성어가 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될 우정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참다운 우정 혹은 오래된 좋은 벗을 일컫는 성어들이 있다. 

지란지교(芝蘭之交)는 지초와 난초는 둘 다 향기가 진동하는 풀들이라 그처럼 친구 사이의 우정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요, 죽마고우(竹馬故友)는 대나무로 만든 말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놀던 친구라 함이니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를 이른다. 지기지우(知己之友)니 십년지기(十年知己)니 하는 말은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를 뜻하는 말이다. 서양 속담에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모두 참다운 우정을 담아내고 있는 좋은 말들이다. 하지만 관포지교에서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그런 우정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다. 세태가 어수선해서일까. 요즘 ‘친구는 무슨 친구’라며 자조 섞인 말을 곧잘 한다. 금전 거래에서 우정에 균열이 왔거나, 여차한 그것도 지극히 사소한 일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세상이다. 퍽 하면 의리 없는 친구다, 배신했다고 상대를 힐난할 것이 아니라 이해와 관용으로 품을 수는 없는 것일까.

“갈치가 갈치 꼴냉이 끊어 먹낸 혼다”, 참 꺼내 놓고 보니 낯 따가운 말이다. 어떻게 동족을 해할 수 있는가. 참 잘못된 일이다. 행여 절친하던 사이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친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다. 나이 들수록 속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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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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