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예외 없이 24시간, 365일이 주어진다. 그러나 동일한 모습은 아니다. 누구에게는 평화롭고 살만 한 나날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우리가 편안하게 잠드는 사이, 대륙 너머 시리아 난민들은 하루도 온전히 보장받을 수 없는 위태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역시 마찬가지다. 최순실이란 민간인 손에 국가 외교, 국방, 정책, 인사를 아우르는 정보가 흘러갔다는 의혹이 전국을 뒤덮은 요즘,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긍정적으로 보는 평가가 10%대까지 추락했지만 누군가는 “연설문 도움 받은 것 가지고 호들갑이냐”, “우리 대통령 흔드는 못된 빨갱이들”이라고 평가절하한다. 

‘10%’와 ‘빨갱이들’ 가운데 진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 질문에 조금이나마 답을 해줄만 한 영화가 한 편 개봉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감독 최승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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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터넷 상에서 유행하는 용어 가운데 ‘팩트폭력’이 있다. 사실을 의미하는 영단어 팩트(Fact)와 폭력의 합성어로,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을 제시하면 오히려 받아들이는 쪽이 폭력처럼 느낀다는 신조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져왔지만 너무 솔직한 나머지 불편하게 느낀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자백>은 팩트폭력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2012년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탈북자 출신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을 간첩으로 몰고간 일명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2012년 기소부터 2015년 대법원 무죄 판결까지 4년에 걸친 과정을 기록하며 결국 국정원과 검찰이 날조와 폭력으로 자작극을 꾸몄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나아가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안기부가 벌였던 유사한 간첩 조작 사건을 조명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비롯해 정보요원, 검사들은 자신이 만든 조작의 틀을 관철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동원한다. 그리고 영화를 제작한 언론사 ‘뉴스타파’의 심층 탐사보도로 간첩 혐의가 거짓으로 밝혀졌음에도 그들은 사과 한 마디를 아낀다. 뉴스타파 최승호 PD가 집요하게 입장을 물어보지만 입을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겸손이 그렇게도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지 되묻게 하는 씁쓸함이 느껴진다.

영화 속 어느 탈북자가 흘리듯이 말하는 내용처럼, 국정원과 검찰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자신들의 알려지지 않은 노력으로 무수한 국가안보위기를 넘겨왔고 조작 사건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일 뿐,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안보 기강을 흔드는 위험한 일이라고 피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이런 주장을 뭉개는 묵직한 팩트폭력이다. 1958년 진보당 조봉암 사건부터 시작해 100여건이 넘는 국정원·검찰의 역대 간첩 조작 사건을 하나씩 나열하는데, 재판 중인 몇몇 사건을 제외하면 단 한 건도 유죄 판결이 없다. 전부 무죄다. 간첩 사건에 휘말려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 영화 속 여러 사연들은 반성하지 않는 공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생생히 보여준다. 몇 십 년이 지나 각고의 노력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어도 망가진 지난 삶은 돌이킬 수 없고, '그들'은 책임지지도 심지어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영화 <자백>을 보며 불편할 수 있다. 26일 열린 박정희 대통령 37주기 추도식 추도사에서 “민주주의가 과잉으로 치달았다”는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펼친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처럼 극우·수구(守舊)적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자백>은 가시방석처럼 느껴질 것이다. 제작진이 던지는 메시지는 좌우이념을 넘어선 인권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색안경을 끼고 영화를 바라본다면 심히 유감스럽지만, 한국 현대사를 알아가는 이들에게 <자백>은 훌륭한 역사 교재다. 공권력이 권력을 위해 남용되는 것이 아닌 시민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진리를 역사적 사실로 보여준다. 교과서에서도 볼 수 없는 역사가 <자백>에 담겨있다. 

제주는 통제에서 벗어난 폭력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몸소 겪은 땅이다. 도민들에게 <자백>이 주는 메시지는 더욱 무겁고 소중하다. 현재 이 영화는 도내 영화관 가운데 메가박스 제주에서만 상영 중이다. 아쉽지만 동시에 다행이다. 비상업영화, 단편·독립영화 전용 상영관이 없는 제주에서 다양성 있는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영화관이 있어 다행이다. <자백>은 ‘남녀노소 한국인이라면 봐야하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추천할 만 하다. 지난 13일 개봉한 뒤 입소문을 타며 누적 관객도 어느새 10만명을 바라보고 있다. 중국, 일본, 북한(?)을 넘나드는 스케일과 속도감 있는 진행으로 나름의 보는 재미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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