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30)  이소마에 준이치 『상실과 노스탤지어』 /고영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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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마에 준이치 (2007년) 『상실과 노스탤지어』 심회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년.
지난해 영화 <암살> 이래, 올해는 <동주>, <귀향>, <아가씨>, <덕혜옹주>, <밀정> 등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되어 극장가를 달구고 있다. 이들 영화는 동일 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각기 다른 지점에서 각양각색의 인물과 이야기들로 꾸며져, 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내셔널 히스토리)라는 것이 국민 또는 국가의 이름으로 과거에 대한 공공의 기억을 구축하는 것이라면, 예술로서 영화라는 장르는 이들 공공의 기억들의 틈새를 파고들어, 공식 기록에서 누락된 정황들, 역사적 인물들의 불안, 갈등, 욕망과 같은 내면의 고유함에 다가서려하고, 심지어는 역사를 비틀어보면서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실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가령, 영화 <밀정>은 1920년대 말, 조선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 사이의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이 숨 가쁘게 펼쳐지는 가운데 항일과 친일을 왔다 갔다 했던 한 조선인 일본경찰이라는 경계인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 사실 내면이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그저 불가해한 불안과 갈등, 절망이 교차하며, 매순간 내 스스로에게도 낯설게 다가오고, 그 어떤 단어로도 타인을 오롯이 이해시킬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내면세계가 <밀정>의 주인공에게만 있었겠는가?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그 누구라도 그런 불가해한 ‘내면’을 끌어안고, 그 안팎을 매순간 넘나들며 ‘나’만이 아는 내가 되었다가, ‘타인’을 위해 포장된(규격화된) 내가 되기를 반복하며 어제를 살았고 오늘도 살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이소마에 준이치의《상실과 노스탤지어》(원서 : 2007년, 번역서 : 2014년)는 바로 이와 같은 ‘내면’의 안팎을 넘나들며, 근·현대일본 지식인들의 정신사를 새롭게 읽고 고쳐 쓴 사상집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지식인들은 근·현대일본이 놓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상과 내면의 부정합성을 발견하고 그 틈새를 사고했던 사람들이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그 목록에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 소설가),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1872~1930, 소설가),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 1875~1962, 민속학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 소설가), 미키 기요시(三木清, 1897~1945, 철학자),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 소설가), 이시모다 쇼(石母田正, 1912~1986, 일본사),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1906~1955,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 소설가), 그리고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 1934~2013, 비교문화론),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1946~, 일본사상사),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 소설가) 등이 등장한다. 

우선 필자가 일본 유학시절 접했던 사상가들이 책에 대거 등장해서 반갑고 그립기조차하다. 무엇보다 이 책의 압권은 저자 이소마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사상가)으로 대표되는 근대일본 담론의 연구 전통을 과감하게 비판하며, 일본의 종교와 역사, 민족의 형성 과정을 둘러싼 담론을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 못지않게 한국어 번역에 있어 문맥 연결이며, 적적한 단어 선택, 역주 작업 등등 심혈을 기울인 번역자(심회찬)의 고뇌와 노고 또한 곳곳에 배어있다. 옮긴이 심회찬은 이 책을 단순한 근대화론이나 일본특수성론이 아니라, 근·현대일본의 역사를 내면과의 투쟁으로서 새롭게 바라보는 책이라 평한다. 

우리는 여기서 ‘근·현대일본’이라는 공간을 ‘담론의 장’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특히 ‘근대일본’이라는 공간에서는 서양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 전통적인 것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염려, 국민국가의 형성과 식민지 획득 등 여러 갈래로 찢겨진 사상들이 혼재한다. 이런 공간에서 어떤 지식 그룹들은 외부적 절대성(프로테스탄티즘, 마르크스주의, 정교분리)에 기대어 사회변혁의 돌파구를 찾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내부적 전통(천황제, 신도, 조상숭배)을 향해 치달으며 ‘닫힌 국민공동체’를 상정하기도 하였다. 기존의 근대일본을 둘러싼 담론 연구는 이와 같이 이들 외부/내부를 대립시키는 구도에서 전개되었다. 저자는 그 결정적인 저작이 가라타니 고진의《일본근대문학의 기원》(1980년)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 책은 근대에 ‘내면’이라는 것이 출현하는 과정을 언문일치의 문장 제도와 결부시켜 설명하는데, 문예비평의 분야를 넘어서 역사학과 사상사 등 다양한 분야에 방법론적 변화를 가져왔다.……1985년부터 연재된《탐구》에서처럼 ‘안/밖’이라는 완전한 이분법적 입장이 선명히 드러나 있지는 않을지언정, 이미《일본근대문학의 기원》단계에서 가라타니는 ‘내부’를 완벽히 밀봉하여 저항의 계기를 가지지 못하는 장소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52쪽)

여기서 저자 이소마에는 가라타니가 ‘내부=동질화 된 일본 또는 나’ / ‘외부=바깥세계’로 대립시키며, 내부에 대한 저항과 변혁의 계기를 외부에서 찾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가라타니에게 “동질화 된 내부는 일본으로, 교통의 장소인 외부성은 미합중국으로 이념화됨과 동시에 구체화된 형태로 그려진다.”(53) 저자 이소마에가 보기에 가라타니의 ‘내부’는 의심의 여지없는, 확고한 ‘나=나’로서, ‘당신=당신’으로서 “각자의 구별을 자명한 전제로 한 후에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54쪽)

반면에 저자 이소마에는 개인 나아가 국가의 내면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이 내면은 지금까지 자명하게 여겨진 ‘나=일본인’이란 신념에 헤살을 놓으며, ‘나=일본인 / 그=중국인’이란 정체성(자기동일성)을 근원적으로 전복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는 내면은 “동질하거나 평평하지만은 않은 어떤 결여태(impossibility)”(59쪽)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내면에선 매순간 희노애락 감정들에 노출되고, 그로 인해 이야기가 탄생하며, 그 과정에서 ‘동일화’의 소용돌이에 빨려드는가 하면, ‘차이’가 촉진시키는 공감으로 변용되는 일들이 숨 가쁘게 펼쳐진다. 이 책에서 저자 이소마에는 바로 이런 내면을 전면적으로 공략하며, 이를 통한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성을 열어젖히고자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라타니가 상정한 기존의 내부/외부라는 이분법적 발상은 불필요해진다. 

여기서 저자가 그리는 내면세계는 나스메 소세키의 ‘절대 고독’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절대 슬픔’의 언저리와도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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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년)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확실히 우리는 생각만큼 명확한 존재가 아니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추악함과 더러움을 내부에 간직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타인으로부터 느끼는 마음의 떨림은 바로 이러한 어긋남에 당황하는 인간들의 서로 공명함으로써 발생하는 긴장이겠지요. 그렇다면 나쓰메 소세키가《마음》(1914년)에서 말한 “나는 죽기 전까지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마음 놓고 흉금을 터놓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자네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되어줄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은 타인에게 어리광을 피워서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방을 구하고자 하는 아슬아슬한 한계점에서 발화된 말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프롤로그’ 28쪽)

다음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국 체험이 가져오는 근원적인 의미 상실에 대한 미합중국 체류기인 《이윽고 슬픈 외국어》(1994년)에 나오는 대목이다.

“‘슬픈’이라고 해도 그것이 외국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거나, 아니면 외국어를 잘 말할 수 없어서 슬프다는 건 아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연유인지 내게 자명성을 지니지 않은 언어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슬픔과 비슷한 느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가끔 일본에 돌아오면, 이번에는 ‘지금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이런 것들이 정말 우리에게 자명한 것일까’라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72쪽)

자신과 모국어의 동일성을 벗겨내고 언어와 자신의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느끼는 슬픔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슬픔이야말로 어쩌면 내 안에 하나의 특정한 요소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기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 안의 내부적 타자를 발견하고, 거기서 ‘외국/일본’의 이항 대립을 만들어 내는 근원인 ‘정체성’ 그 자체의 작위성을 문제시 하는 자세”(79쪽)를 배양하게 된다.

이런 논지로 저자는 1920년대 중반에 탄생한 야나기타 구니오의 민속학과 동아시아외교에 걸림돌이 되는 야스쿠니 신사의 ‘제사’ 정치학에도 한 장씩 할애하고 있다. 저자는 야나기타 구니오가 자신의 학문을 서양의 보편성에서 분리시키고, 그의 표현이 점점 ‘닫힌 국민공동체’로 전환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야나기타의 이런 행보에 대해 저자는 “(이처럼) 내부를 향해 닫혀간다는 것은 외부에 대한 배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부의 동질화되어 질식하고 말 위험성 역시 가지게 되는 것이다.” (184쪽)라고 일갈한다. 

또 야스쿠니를 다루는 장에서는 나라를 위해 죽은 영혼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과연 죽은 자들이 이러한 국가 제사에 찬동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는다. 저자는 “죽은 사람의 흉중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일방적으로 단정하는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의 존재를 떠올리고 싶다면,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죽어간 그들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뇌를 상기하기 위한 의례로서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216쪽)는 지적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 책《상실과 노스탤지어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의 주제는 ‘여백’이라고 쓰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국가에게도 개인에게도 존재하는 내부(내면)와 외부 사이의 여백 말이다. 이 여백은 순수하고 완전한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되는 것을 막는 여백이다. 자신이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어그러뜨리는 여백. 물론 그러한 여백으로 정체성의 혼돈을 맛볼 수도 있다. 

필자는 이 여백을 ‘완충지대’라는 말로 바꿔 이해하고 싶다. 이는 사전적 의미로는 둘 또는 둘 이상의 강한 나라나 세력 범위 사이에 있어서, 그들의 충돌을 완화시키는 중립 지대를 가리킨다. 그때까지 명쾌하게 존재하던 자신의 온갖 정체성—일본인 또는 한국인, 연구자, 범죄자, 남자, 여자 등—의 붕괴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선 “모든 걸 빼앗긴 제로 상태의, 있는 그대로의 나”(무라카미 하루키)와 당신이 만나 새로운 유대, 연대, 공동성 모색이 가능해 진다. 이는 필자가 지난 원고(2016.2.15.)에서 소개한 김현경의《사람, 장소, 환대》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환대(즉,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 하지 않는 환대)’가 이뤄지는 장소일 거란 생각도 든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가속화 되는 오늘날, 일본사회는 물론 한국, 중국, 미국, 아랍, 유럽사회 어디를 막론하고 국민들(개인들) 스스로가 가족이나 국민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 여백(완충지대)를 도려낸 균질한 정체성 재구축을 원하고 있다. 국민의 일체감의 상실과 이를 회복하려는 노스탤지어가 전체주의 아래 모여 드는 추세다.

IS테러에 대한 공포, 국제난민 발생, 영국 국가주의 등장, 일본의 인종차별 시위, 북한의 도발, 또 최근에 제주사회에서 급속하게 확산되는 혐중발언(헤이트 스피치) 등등의 담론들 또한 뜨겁다. 국민의 사고와 의식이 점점 경직되고 서로 까칠해지고 타자에 대한 불신감 역시 높아지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 일상의 여백(완충지대)은 설 자리를 잃었다. "여백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새로운 지식이 태어날 토양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지지 못할 것"(15쪽)을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가두고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단지 ‘근·현대일본’ 지식인들의 정신사를 탈구축하며 지적 유희를 즐기고자 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서로의 ‘소통’의 회로가 점점 막히는 국제무대/현대사회에서 각 주체들(자신, 개인, 국가, 소수자, 디아스포라 등)이 삶의 당혹감 또는 괴로움 속에서 어떻게 여백(완충지대)을 만들고 그 여백을 통해 새로운 연대를 이끌 수 있는가라는 사유를 담고 있다.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오에 겐자부로)는 웅성임이 여전히 여기저기서 들리는 가운데…….

* 저자 이소마에 준이치(磯前順一, 1961년~)는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일본종교학을 전공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비평에 입각한 연구들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의 탈식민주의 연구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재일 조선인, 소수자,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학문적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 고영자(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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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및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미학론, 제주 ‘이미지’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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