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22) 한라봉 효소를 걸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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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다수병을 꽉 채운 한라봉 효소. ⓒ 김연미

6월말에 담갔던 한라봉 효소를 걸러냈다. 12리터 병에 담겨 있던 한라봉 열매를 건져내고 남은 액을 따라내니 삼다수병 하나가 조금 넘게 찬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고체 속 물기가 내 눈 앞에서 제 존재를 증명해 내고 있다. 갈색 설탕을 타 놓은 듯한 색깔의 효소액이 삼다수병 안에서 곱다. 자잘한 한라봉 과즙이 부서져 자세히 들여다보면 혼탁한 액체인데 삼다수병 안이라서 그런지 투명하기까지 하다.

한 국자 덜어내 물을 섞었다. 연두 빛이 도는 듯, 노란색이 도는 듯, 제3의 세계인 듯, 고급스런 파스텔톤 계열의 색감이 눈을 즐겁게 한다. 삼다수병 안에 담긴 갈색 원액에서 나온 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색감이다. 맑아진다는 것은 사물의 속사정까지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라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보다. 물을 많이 탈수록 색감은 더 얇아져 원액에 담긴 각종 사연을 겹치지 않게 다 보여줄 것만 같다. 신기하다. 그 얇은 색감에 담긴 여유와 여백이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설탕이라는 힘에 의해 분리된 몸체와 물기. 제 몸에 있는 마지막 수분까지 다 빼내고 누워있는 몸체의 색깔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다. 푸르던 젊음은 물론 마지막 남은 희망의 찌꺼기까지 다 빠져나간 모습이다. 빠져나가려는 것과 남겨두려는 것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바람과 고뇌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 지난한 싸움의 끝자락에 푸름과 향기를 다 내 주고 빈 몸만 남았다. 이제 무(無)로 돌아가야 할 시간. 승리의 잔에 가득 따라질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은 제 것이 아니다. 부패의 문턱을 넘어 산산히 공중분해가 될 한라봉의 표정이 순간 가슴 한쪽에 남는다. 그러나 그건 그의 운명이다.

가급적 우아하게 와인 잔을 꺼내들었다. 7월과 8월의 혹서를 견디며 익은 맛은 어떨까. 혀의 감각을 최대한 긴장시키고 투명한 유리잔에 비치는 색감을 음미하며 입술을 댄다. 아련하게 느껴지는 한라봉의 향기, 신선하다기보다는 완숙하게 익은 향기다. 마흔 살 여인의 향기랄까. 상큼한 이십대나 8월의 햇살처럼 깊어진 삼십대의 이미지와는 또 다르다. 인생 뒤편의 어둠을 인지하고 함부로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런 향기가 코끝에 스민다. 나무에서 순리대로 익어가는 제 동료들보다 조금 더 세상을 알아버린 듯한 향기가 익숙하게 다가온다.

이어 입술을 통해 조금씩 들어오는 맛, 혓바닥 세포 하나하나가 감지한 맛의 집합이 쓰고 달고 시고, 세 가지 영역으로 묶였다. 그 세 가지 맛은 다시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영역을 탄생시켰는가. 혀의 세포에서 머리속으로 전달되는 동안 어느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거치는가.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맛이 나의 뇌파를 흔들어 놓는다. 기분 좋은 상큼함이 전신에 확 퍼진다. 이만하면 되었다.

어리숙한 농부가 처음 만든 한라봉 효소치고는 이만하면 성공한 셈이지 않을까. 매사 마무리가 부족하여 글을 써도 뒤끝이 개운치 않고, 손끝마다 흘리고 다니는 게 많았었다. 그렇게 늘 부족하다 여겨지는 20%의 영역은 내년의 몫으로 남겨두자. 혼자 안달한다고 당장 그 부족함이 채워질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은 좀 더 향기롭고, 좀 더 상큼하고, 좀 더 달콤한 효소를 만들어 해마다 내게 줄 것이다. 자, 이제 이 달콤하고 씁쓸하고, 상큼한 음료를 어떻게 나누어야 잘 나누었다고 소문이 날까.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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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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