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21) 여름나기

aj1.jpg
▲ 한라봉. ⓒ 김연미

한라봉 매달기까지 끝낸 과수원은 조용하다. 새벽을 열던 농부의 발자국 소리가 멎고, 아침 저녁 농부를 실어 나르던 자동차 소리도 없다. 자동센서로 비닐하우스 천정이 열리고 닫히던 소리도 없다. 태풍을 대비해 하우스 천정에 있는 비닐을 걷어 냈기 때문이다. 그 새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잊었나. 문 열기가 무섭게 달려오던 두 마리 오리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 시원한 그늘을 골라 낮잠이라도 자고 있는 것인가.

한 눈에 보아도 달라진 것은 없다. 마지막 한라봉까지 끈으로 묶어 매단 뒤, 조금은 아쉬운 마음과 함께 하우스 문을 닫았던 그 모습 그대로다.

귤나무가 드리운 그늘 아래로 바랭이 몇 개 긴 몸체를 어렵게 가누고 있다. 적당한 습기와 충분한 영양, 세포분열을 가장 왕성하게 해주는 안성맞춤의 온도를 만나 이들의 성장속도는 가히 폭발적이다. 내가 돌아보지 않았던 일주일 사이 싹을 틔우고 한 뼘 정도의 키가 자랐으니 말이다. 가만히 보면 바랭이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이름도 모르는 잡초들이 슬금슬금 다시 들어와 부지런히 크고 있다. 어디서든, 어떤 환경이든 발붙이고 살아보겠다는 그들의 노고가 보인다. 그러나 조만간 잡초를 다시 뽑아야겠다. 

귤나무 가지 끝으로 연두색 어린 순이 돋아나 있다. 적당한 숫자의 여름순이 돋아나고, 그 순이 빨리 굳게 된다면 내년에 해거리 현상이 없다고 했다. 여름 순이 제법 골고루 나 있다. 그것만으로도 내년을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데, 자세히 보면 나뭇가지에서 연두색이 빠지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더구나 그 여름순은 잎이 뒤집히도록 꼬여있고, 더러 독한 햇살을 이겨내지 못해 벌겋게 타버린 것도 있다. 병충해에 더위에 여린 순이 혹사당하고 있는 것이다.

장마에 이어진 폭염이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며 온도 그래프를 가파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체온보다 더 높은 기온이 새삼스러울 것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선풍기 하나로도 여름을 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어림없다. 에어컨도 용량이 좀 되어야 한다. 에어컨은 있는데 전기요금이 무서워 가동을 못한다는 사실이 사회이슈가 되고 있다. 사실이다. 에어컨을 어찌어찌 장만한다 하여도 전기요금을 생각하면 좁은 집 한 구석에 장식품이 될 때가 많으니 말이다.

장식품이 될 에어컨도 없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여린 순 몇 개가 그렇게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말라버렸다. 이런 날씨가 좀 더 지속이 된다면 나머지 새순들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 방법은 없는 것인가. 가을에 전정을 해서 말라버린 새순을 다 다듬어 내면 된다고 하지만 더위에 목숨을 놓아야 하는 것들에게 유독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올 여름 이 더위에 얼마나 많은 약한 것들이 저 새순처럼 말라가고 있을 것인지.

그 더위에서도 한라봉 열매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농작물이 자란다고 하지만 농부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제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게으른 농부나 폭염을 하소연 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까지.

시간은 반드시 우리 편임을 믿는다. 그 시간은 결국 폭염을 사그라들게 할 것이고, 한라봉의 무게를 더 무겁게 할 것이다. 한라봉을 매단 끈이 더 팽팽하게 당겨질 즈음 과수원 초록 나무 사이사이 노란 색깔이 번질 것이다. 그 때까지 마음 허물지 말고 버티는 것, 우리가 할 일이다. / 김연미(시인)

a1.jpg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