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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우리 곁으로 온다. 매주 한편씩. 시보다 사람이 큰 시인 김수열. 제주 섬에서 나고 자란 그가 30여년 정들었던 교단을 떠나며 시를 담은 도시락(島詩樂)을 들고 매주 월요일 아침, 독자들과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살다가 시가 된 제주 시인과 그들의 시를 김수열 시인이 배달한다. 섬(島) 시인들이 토해 낸 시(詩)가 주는 소박한 즐거움(樂)이 쏠쏠할 테다. 시 낭송은 시를 쓴 시인이 직접 맡고, 김수열 시인은 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소리를 끄집어내 우리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의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닮은 시인의 목소리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가슴을 든든히 채워줄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 산책’에 <제주의소리> 독자들도 함께 동행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수열 시인의 도시락(島詩樂) 산책](50) 노루귀 / 이창선


핑크빛 열애 같은 첫 출근 언제였나

태연한 척 고개 들어도 내가 보인다

한 겨울 꽁꽁 언 평화로, 안부를 묻고 간다


밤이면 술독 위에 한 발을 올려놓고

갈지자 걸어온 길 휘청인 나 보인다

싸락눈 흩날리듯이 어느새 녹아드는


서귀포, 제주시로 떠돌던 바쁜 나날

잃어버릴 것도 없는데 찡하는 가슴 한쪽

봄이면 꽃대 세우고 멈칫대는 노루귀


이창선 : 『시조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우리집 별자리』가 있음.

꽃줄기나 잎이 올라올 때 노루의 귀를 닮았다 해서 노루귀라 한답니다.
세상의 작은 소리조차 귀 담아 듣는 여린 식물이지요.
노루귀를 떠올린다는 건 한 겨울 저편에서 아른아른 다가오는 새봄을 기다린다는 말이겠지요.

첫 출근길을 떠올립니다.
한 굽이를 넘어선 듯하여 아득하기만 합니다.
일주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고 달려 다다른 바람찬 어느 낯선 곳이었지요.
핑트빛 열애 같은 뜨거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지요.
밤이면 술독 위에 한 발 올려놓은 날, 참 많았습니다. 외로운 사람끼리 여럿이 그랬습니다.
지금은 싸락눈 흩날리듯이 세월 속으로 흘러가버린 지난날입니다.
그 무렵 오며가며 노루귀를 만난 기억조차 없습니다.
어느 나무 아래 핀 듯 안 핀 듯 다소곳이 앉아 있는 노루귀를 알아채기에는
너무 철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 김수열

김수열: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생각을 훔치다』, 『빙의』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 시·시낭송 / 이창선 시인
* 도시락(島詩樂) 배달 / 김수열 시인
* 영상 제작 / <제주의소리> 박재홍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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