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꽃 사과를 보며

22일(토) 아침,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비는 사람의 마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소낙비도 아니고 이슬비도 아니고 안개비가 내리니 온 세상이 안개에 휩싸여 있다.

안개비를 맞으며 떠난 곳은 북제주군 함덕에 위치한 감귤주말농장. 어찌된 일인지 올 봄에는 주말마다 비가 내렸다. 그렇다보니 그동안 농장 발걸음도 뜸했다. 농장은 얼마나 주인을 기다렸을까?

▲ ⓒ김강임
감귤농장에 들어선 순간, 게으른 주말 농부는 활짝 핀 꽃 사과에 넋을 잃었다. 2년 전이었다. 제주도 한라수목원은 해마다 4월이면 '내 나무 갖기' 운동을 벌였다. 그때 내가 심었던 '내 나무'는 꽃사과 2그루. 그때만 해도 꽃사과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당시 70cm 정도 되는 꽃사과나무는 마치 죽은 나무처럼 딱딱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내 키만큼 자라 꽃망울을 터트릴 줄이야.

▲ ⓒ김강임
더욱이 2년 동안 무심하게도 꽃사과나무를 한번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아니 꽃사과나무를 심었던 것조차도 잊어버렸다고나 할까?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검은 흙 속에 뿌리내린 꽃사과는 놀랍게도 꽃망울을 터트린 것이다. 봄비 속에 감귤농원을 돌아보면서 하얗게 피어나는 꽃사과 앞에서 숨을 죽였다. 5장의 꽃잎은 무성의한 나를 질타라도 하듯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꽃잎을 보고 속삭였다. "꽃잎아! 미안하다.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라고. 꽃잎은 내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 ⓒ김강임
안개비에 흠뻑 젖어 있던 꽃봉오리는 온몸을 물방울로 감싸고 있다. 꽃봉오리가 아플까봐 손끝으로 물방울을 툭-툭 털어주니, 꽃봉오리는 금방 활기를 되찾는다. 비료 한 번 주지 않고, 농약 한 번 주지 않아도 쑥쑥 잘 자라 준 꽃사과나무. 꽃사과나무는 얼마나 주인의 사랑을 기다렸을까?

▲ ⓒ김강임
꽃잎을 떨어뜨린 꽃봉오리들은 뜻하지 않은 주인의 방문에 신이 나 있다. 나는 그동안 꽃사과나무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저 땅에 심어만 놓고 홀로 자라기를 바라진 않았던가? 오순도순 모여 있는 꽃잎들은 봄비 속에 소곤거린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대모를 만난 듯 반가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김강임
꽃봉오리마다 맺힌 눈물은 파란 이파리에 뒹군다. 말은 못해도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과 꽃. 꽃잎은 자기들끼리 얼굴을 비비기도 하고, 입을 맞추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막 개화를 서두르는 꽃봉오리에게 꽃의 의미를 말하기도 한다.

▲ ⓒ김강임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꽃사과. 자신의 고향을 멀리 떠나 제주도의 검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향기와 빛깔을 자랑하는 의미. 나는 이들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봄비 속에 피어나는 꽃사과나무 옆에서 '김춘수님의 꽃'을 떠올린다.

▲ ⓒ김강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의 시 '꽃' -

▲ ⓒ김강임
꽃사과의 빛깔과 향기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것처럼 나 또한 이 세상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꽃사과를 보며 나 자신의 눈짓, 몸짓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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