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20] 제7대 제주도지사 길성운 ⑤

1955년 8월5일에는 제주시제 실시가 정식으로 공포되면서 초대 시장선거에 도민들의 관심이 쏠렸다.

시장 후보에는 현 제주읍장인 김차봉, 김영진 제주적십자사제주지사장, 이인구 상공회의소부회장, 최광식, 김두수 반공통일연맹위원장 등 5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50명의 읍직원들이 야근을 하며 시제실시에 따른 준비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가운데서도 김차봉과 김봉건이 시장출마의사를 정식으로 표명했고 이인구와 김영진은 출마의사를 유보하고 있었다.

이어 최수진 제주읍 부읍장이 시장출마를 선언, 현 읍장·부읍장이 나란히 시장선거에 나섰다.
9월1일 전 도민의 축하 속에 제주시제가 실시됐다. 1946년 8월1일에 도제(道制)가 실시되면서 읍으로 된지 9년만에 맞는 기쁨이었다. 읍직원들은 자동적으로 시직원으로, 22명의 읍의회의원들은 시의회의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제주시의회는 이날 오전11시 첫 개원과 함께 1차 본회의를 열고 초대시장 선거에 들어갔다. 재적의원 전원이 출석했다. 초대 시장을 직접 선출한다는 흥분이 가득찬 분위기 속에서 시장후보로 출마한 김차봉, 최수진, 김봉건 등이 의장석 옆에 나란히 앉아 눈길을 끌었다. 방청석에는 이를 지켜보는 주민들로 만원을 이뤄 시장선거의 뜨거운 열기를 보여주었다.

1차 투표에서 최수진 11표, 김차봉 6표, 김봉건 5표를 각각 얻어 과반수 이상의 득표자가 없어 2차 투표에 들어갔다.

초대 시장은 개회 12시간50분만인 이날 밤 11시50분에 끝난 결선 투표에서 최수진 14표, 김차봉 7표, 김봉건 1표로 최 부읍장이 김 읍장을 누르고 초대 시장으로 선출됐다. 결국 김봉건의 표가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는 최수진에게 몰아줌으로써 최수진이 초대 시장으로 당선됐다.

의원들 사이에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었다. 김 읍장은 자신이 처음 밝힌 대로 시제 실시의 산파역을 맡고 물러섰다. 초대 시장의 임기는 내무부의 유권해석에 따라 선거일로부터 기산(起算)해 4년으로 결정됐다.

신임 최 시장은 구릿빛 얼굴에 특유의 미소를 띠며 "나보다 유능한 인재가 많은데도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은 시의원 여러분과 6만 제주시민의 적극적인 후원에 있었다고 보며, 민의를 존중하고 실천해 나가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당선소감을 피력했다.

최 시장(50)은 제주시 광양 출신으로서 1927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남도 종묘장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제주도농회 업무과장을 역임했으며 제주 부읍장에는 1950년에 부임했다. 내무부는 제주시의 기구로서 총무·재무·산업·건설 등 4개과를 두도록 하는 한편 읍 당시에 40명이던 직원을 정원 60명으로 승인했다.

이어 초대 제주시의회 의장에는 신두방, 부의장에는 김영호를 각각 선출했다. 최 시장은 9월8일 길성은 지사에게 부임신고를 마친 뒤 제주시 부시장에 북제주군 내무과장 좌성은(左聖恩)을 기용했다.

길 지사는 제주지역의 오랜 숙제들이 하나 둘씩 해결됨에 따라 제주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에 행정력을 집중시켜나갔다. 당시 제주현안은 △제주~목포간 여객선 1일1회 출발제 △제주~부산간 여객선 격일제 정기선 취항 △도내 일주 철도 설치 △공동목장시설개선 △소형어선의 건조와 어항확충 △한림읍 승격 및 한림면의 분리 △서귀면 및 대정면의 승격 △한라산 국립공원 지정 △한국은행 및 산업은행지점 설치 △임업시험장 설치 △이재민 농가에 대한 면세 △감귤증산장려 및 국고보조 △사방(砂防)공사추진 △횡단도로 수리비 국고보조 △항공노선 개설 등으로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중앙 절충에 매달렸다.

제주시 승격이 되던 1955년은 6.25 사변으로 피난민들이 제주에 입도한지 만 5년이 되는 해였다. 1.4 후퇴 당시 9만8000여명에 이르는 엄청난 피난민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제주사회는 한때 상당히 혼란을 겪기도 했으나 서울수복 등에 의해 1953년 12월과 1954년 7월 두 차례에 걸쳐 대부분이 귀향하고 2374세대에 1만560명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들 대부분은 해안가와 중산간 부락에 살면서 제주지방의 언어와 풍속 교육 경제 등 여러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동안 제주에는 기독교회가 30개소, 천주교회가 3개소 늘어났고 거리에는 여 자들의 머리와 옷 모양이 달라졌다. 당시 피난민의 거의는 서울·경기 출신들이었으며 일부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이었다.

또한 피난민의 입도는 그때까지 양력과세가 대부분이었던 제주지역의 명절풍습을 음력으로 돌려놓아 행정에까지 이중과세의 혼란을 가져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세계가 양력으로 명절을 쇠고 있는데도 우리나라만 음력명절을 쇠고 있어 후진국의 인상을 벗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정부에서는 양력설을 강력히 권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길 지사는 그해 연말을 맞아 각 시군에 「단일과세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양력과세를 권장하는 한편 계몽강연을 나서도록 했다. 제주시에서도 명절을 앞두고 담화를 발표, "제주시는 제주도의 관문인 만큼 양력명절을 쇠도록 해야 하며 양력명절은 과거 일본사람들만이 지키는 관습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전세계적으로 쇠고 있고 국가적 위신으로 보아도 당연히 양력설을 쇠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남군의 일부 지역에서만 양력명절을 지키고 있을 뿐 제주시와 북제주군은 거의 음력설을 쇠었다. 이에 따라 제주시당국은 1956년 2월12일 구정(舊正)을 앞둬 양력과세에 대한 계몽책으로서 제주시내 관덕정, 제주시청, 동문로터리 등 3곳에서 일반행인 1000명을 대상으로 주민의견을 조사한 결과 40.2%가 음력과세를, 36.4%가 양력과세를 하겠다고 대답해 행정기관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음력과세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이중과세를 하지 말자고 주장하던 공무원과 지역유지들도 구정 때에는 세배하는 풍습을 버리지 못했다. 이처럼 1950년은 매년 연말 때면 이중과세 문제로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제주시 승격으로 술렁이던 한 해가 지나고 1956년 3월에 들어서자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전국대의원대회에서 5월15일에 예정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전격 선언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제주도민들은 제주지역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제주발전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던 이 대통령의 출마포기 선언에 충격을 받고 「이 대통령의 3선 출마」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갔다.

제주도청을 비롯한 행정기관의 조직적인 충성작전과 함께 범도민운동으로 「李 대통령 3선 출마요청 궐기대회」가 3월11일 한림면을 시작으로 3월20일까지 각 시군과 읍면에서 잇따라 개최됐다.

3월14일에는 제주시에서 노총(勞總) 주최로 해륙운수 주정공업주식회사 조운(朝運)제주지점 사원 100여명이 트럭 3대에 나눠 타고 「남북통일은 李 박사의 3선으로」 「李 박사의 3선 요청 촉구」 등을 쓴 플랜카드를 달고 시가행진을 벌인데 이어 3월20일에는 제주도애국연합회(위원장 박치순) 주최로 범도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국민들의 절실한 요청에 의한 재집권」을 노린 이 대통령의 계획은 그대로 맞아 떨어지면서 81회 생일인 3월26일에는 전국민의 요구로 "재출마 포기선언을 취소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맞춰 이날 저녁 관덕정에서는 이 대통령의 방미(訪美) 뉴스 기록영화가 상영됐고 한국보육원과 제주여고생들의 무용과 노래 등 잔치마당이 벌어졌다. 또 각 기관에서는 이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식수를 경쟁하듯 전개했다. 이 대통령의 생일축하행사는 3월29일까지 계속돼 본격적인 선거전이 있기 전부터 야당의 기세를 완전히 제압해버렸다.

길 지사는 선거를 불과 한달여 앞둔 4월10일 부통령 출마자인 이기붕(李起鵬) 국회의장이 4월12일에 제주를 방문할 것이라는 전문을 받았다. 이기붕은 당시 「제2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실력자였다. 지역현안을 안고 있는 길 지사로서는 모처럼의 기회로 삼고 관덕정 앞에 환영아치를 세우는 등 영접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 의장이 오는 날 아침에는 주민과 남녀 고교생 1000여명이 급히 동원됐다. 길 지사는 전인홍 도의회 의장과 육군경비사령관, 지역유지 70여명과 함께 비행장에 나가 이 의장을 영접했다. 또 비행장에는 경찰악대와 의장대, 한국보육원 악대가 동원됐으며 시내 연도에는 경찰관들을 배치까지 했다.

그러나 이 의장은 도착예정시간인 이날 오전10시30분이 훨씬 지난 오후 1시께 기상불순으로 제주방문을 할 수 없다는 전보를 보내와 대대적인 영접행사는 무산돼 버렸다.

이날의 환영행사는 나중 야당지로 알려진 경향신문에 「환영핑계한 선거운동, 주민과 학생 강제동원」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보도됨으로써 전국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 제주도결당 준비대표위원이면서 경향신문제주지사장인 고담용(高湛龍)이 신문에 3단 기사로 "이기붕씨가 선거운동차 4월12일 제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있자 제주시에서는 시민 100여명과 학생 1000여명을 동원시켜 수업에 지장을 주었다. 또 환영아치 등으로 교모한 선거운동을 펼쳤다. 그것은 국회의장 자격으로서 처음 내도하는 李 의장을 환경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나 환영을 핑계한 선거운동이었다. 또 경찰은 이날 오전7시부터 동장 등을 앞세워 주민들을 동원시켰다"고 보도했다.

경찰은 경향신문의 기사를 즉각 반박에 나섰다. 이 사건은 제주도내 자유당과 민주당의 싸움으로까지 번져 나갔다. 그러나 자유당은 4월20일 오히려 李承晩 대통령을 찬양하는 선전탑과 현수막을 거리 곳곳에 설치하는 등 야당의 비난을 묵살하는 한편 대한노총도 거리에 「대통령에 李承晩 박사 부통령에 李起鵬 선생을 모셔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 노동자의 생활을 확립하자」는 내용의 벽보를 붙여 드러내놓고 자유당을 지지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에서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벽보를 붙이는 등 양당의 정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선거열기는 5월에 들어서면서 더욱 뜨거워졌다. 관권개입은 노골화됐다. 길 지사는 5월3일 담화를 발표하고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국정의 수반이자 국가를 대표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등 막중한 책임이 있으므로 잘 선택하되 통일과업완수에 어떤 사람이 가장 적절한지 잘 인식하여 선거에 임해주길 바란다"는 말로서 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은근히 촉구했다.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른 5월5일 오전6시40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申翼熙)가 호남지방 유세를 위해 기차를 타고 가던 중에 차 안에서 갑자기 사망하여 선거는 싱겁게 이승만 대통령의 3선으로 굳혀졌다.

압도적인 득표로 3선에 당선된 李承晩 대통령은 선거가 있은 지 8일만인 1956년 5월23일 오전10시40분 제주도에 대규모 목장건설을 위해 美8군사령관에서 전역하여 한미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밴플리트를 대동하고 제주에 왔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네 번째 방문이었다.

그러나 이날 이 대통령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기상 때문에 제주비행장에 내리지 못하고 모슬포비행장에 착륙해야만 했다. 이 대통령은 도착 즉시 남제주군청에 마련된 군민환영대회에 참석하고 "이번 방문은 제주도에 큰 목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이라고 소개하고 군청에서 간단한 점심을 들고 오후에는 길 지사의 안내로 서귀포 북쪽에 있는 목장지대를 돌아봤다. 이날 이 대통령은 비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감귤과수원과 관광지 등을 차례로 돌아본 뒤 오후5시에 귀경했다.

길 지사는 당초 이 대통령의 순시일정으로서 관덕정에서 도민환영대회를 가진 후 구좌면의 비자림을 거쳐 그 일대(현재의 松堂목장 부근)를 돌아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계속된 비날씨로 제주시 방문을 취소하고 모슬포비행장에서 이도했다.

길 지사는 이 대통령의 네 번째 방문이 제주도에 대단위 목장건설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필요한 기초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목장건설에 필요한 자료조사에 여념이 없는 길 지사에게 경무대로부터 상경지시를 받은 것은 1956년 6월10일로서 이 대통령의 제주방문이 있은 지 보름여만이었다.

이 대통령은 길 지사에게 비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도민들이 보여준 환영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나서 "제주도는 축산과 관광만이 도민들의 소득을 증대 시킬 수 있으므로 축산과 관광산업, 차(茶) 재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나가되 남양(南洋)산 식물을 보내 줄 테니 잘 가꾸어보라"고 지시한 후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한번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특히 축산업은 제주에서 유망한 산업인 만큼 도민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정부에서도 적극 지원하겠으며 한미재단의 지원을 얻어 가축사양에서부터 착유, 버터·치즈·통조림·모사(毛絲) 공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계통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괄식 축산사업을 계획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어 "외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는 차(茶) 원료를 제주에서 재배하면 좋을 것 같은데 차 씨앗을 주면 잘 재배하되 처음 생산된 것을 경무대로 보내면 내가 직접 맛을 보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의 차 재배지시는 한달전인 5월23일 내도 때에 감귤과수원에 차가 조금씩 재배되는 것을 보고 착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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